우리는 중무장 장비를 보고서는 거개 찬탄을 거듭하니
멋진 투구, 폼나는 갑옷, 더 폼나는 말갖춤을 보고서는 와! 저렇게 폼날 수가? 한다.
이런 반응이 나라고 무에 별다를 수 있겠느냐마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어
저러고도 무슨 쌈박질을 하려 하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더라.
저런 중무장 장비는 개똥폼 낼 때나 잠시간 걸쳤을 뿐이며, 저 상태로는 기동력이 현격히 떨어져 나 같으면 다 벗어버리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저런 중무장 장비는 늘 강조해서 거듭거듭 말하지만, 전쟁을 해서 이기겠다는 발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은 어찌하면 적들이 쏘는 총탄에도 살아남겠다는 처절한 발악의 소산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 묻겠지만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이 둘을 구분해서 접근하는 방식이 나는 필요하다고 본다.
저런 중무장 장비를 접근하는 방식이 실상 저런 일을 전업으로 일삼는 사람들, 예컨대 역사학도나 고고학도라 해서 하등 다를 바가 없어,
이 친구들은 그래도 그것을 전업을 삼지 아니한 일반인과는 조금은, 그리고 어딘가는 달라야 하지만, 실물 앞에 눈알이 벌개져서는 이건 무슨 기술로 만들었으며,
이건 주물이 아닌 단조요, 이건 철기문명의 증거를 말해주며, 이건 또 동시대 문화의 한반도적 독특한 발현이요, 이건 또 이리 등장해서 이리 변모하고 이리 발전해갔다 해서
학문의 본령을 망각해버리고는 상찬론만 일삼게 되거니와
나는 저런 중무장 장비를 볼 때마다, 저런 장비를 하고 다녔을 군인과 우마가 불쌍해 죽을 지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 덕지덕지한 중무장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장비가 아니라 내가 죽지 않기 위한 장비에 지나지 않는다.
저 무거운 중장비는 그런 까닭에 내가 진짜 생명의 위협을 처했을 때는 가장 먼저 버려야 할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왜? 저런 중장비는 내 줄행랑의 속도를 현격히 떨어뜨리는 까닭에 내가 목숨을 건져야 하는 절체절명한 순간에는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짐짝에 지나지 않았다.
밑도끝도 없는 중무장 상찬론은 이제는 거두어야 할 때다.
동아시아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말 중에 빠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말로 치중輜重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전투에서 누구랑 싸워 대승하니, 적이 치중을 버리고는 도망쳤다
이런 구절로 등장하는데, 저 치중이 바로 중장비 일체를 말한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자리엔 패한 적들이 버리고 간 저런 치중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노획물이라 한다.
전장터에서 건질 게 시체 말고 더 있냐 하겠지만, 전근대 전투는 그렇지 아니해서 줄행랑한 적들이 버리고 간 치중 하나하나가 다 돈이었다.
요즘의 대포에 비견하는 중장비도 있고, 개별 군인 병사들이 버리고 간 것들이 수북수북 쌓였으니, 그땐 군량도 내가 지고 다닐 때라, 이 군량조차도 목숨을 건져야 하는 나한테는 짐짝에 지나지 않는다.
전근대 전쟁은 실은 중무장 장비 일체를 도판판에 내건 all or nothing의 생존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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