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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眞德, 꿔다논 보릿자루 멀대여왕] (3) 정적을 처단하고 공포정치를 개막한 칠성파의 절대지존 김유신

by taeshik.kim 202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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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덕여왕 시대 왕은 꿔다논 보릿자루였으니, 이는 진덕 개인 성향도 한 몫을 했을 성 싶거니와, 그는 첫째 왕으로서 신민을 군림하며 그들을 시종 주도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던 듯하며, 둘째 집권과정에서 그 자신의 뜻 혹은 힘이 아니라 엎혀서 권좌에 오른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이는 분명 그 직전 권좌를 군림한 사촌언니 선덕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런 선덕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쓰러져 눕자, 이 와중에 권좌 탈취를 노린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신라사회를 일대 혼란에 빠뜨린 이 쟁투는 김유신 시대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피바람을 일으켜 정적들을 처단하고 공포정치를 개막한 김유신 by 여송은

 

 

그 반란진압 총사령관으로 마침내 비담을 짓눌러 버린 김유신은 그 와중에 선덕이 세상을 떠나고 진덕을 옹립하고는 그 수습책으로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비담의 잔당 토벌이었다. 난에 직접 가담한 이는 물론이고 그와 내통한 흔적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색출해 처단했으니 삼국사기 진덕왕본기 원년(647) 1월에 이르기를 이달 17일

비담毗曇을 베어 죽이니, 이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생각해 봐라. 맨날맨날 친구이며 선후배라 해서 보던 관료 중 서른명이 일시에 목이 달아났다. 죽인 사람만 서른명이지만, 그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유배되고 강등되고 신분이 격하된 사람이 수백명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진덕왕 시대는 공포정치로 개막했다. 그 공포정치를 연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김유신이었다. 그는 절대권좌였다. 언터처블이었다. 그는 막후실력자가 아니라 막전실력자였다. 


진덕왕 꼭대기에 눌러앉은 김유신 by 여송은

 

이미 이 당시 53세에 달한 김유신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래도 원로들을 예우하는 모습을 연출했으니, 그리하여 원로회의라는 허울을 만들어 자신이 독재자가 아님을 포장하려 했다. 그 원로원회의는 알천한테 위원장 자리를 주고는 자신은 말석에 앉은 쇼를 연출했다. 그 멤버는 삼국유사에서는 6명이라 했지만, 화랑세기를 보면 그에다가 보종寶宗이 들어간 7명이라, 왜 삼국유사에서는 보종을 뺐는지 다름 아닌 화랑세기에서 짐작하거니와

 

보종은 성격이 나대지 않았으며, 철저한 오두미도 신도로, 개인수양을 중시하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덧붙여 그는 여자보다는 남자를 밝힌 남색남이었다. 그래서 이 원로원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고, 매양 하는 말이 "저는 여러분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한데 이 화랑세기에는 보종의 이런 행각과 관련해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반드시 유신공이 사람을 보내 보종공의 뜻을 물어 결정했다 하거니와, 그때마다 보종은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고 사양했다고 한다. 보종은 그런 사람이었다. 


다음 왕은 춘추 어때? 반대 있어? 나와봐! by 여송은

 

이 대목이 왜 무서운가? 김유신이 국사의 대사大事를 결정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는 비단 화랑세기가 아니라 해도 진덕왕시대 누가 진짜 왕좌의 주인인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거니와, 맞다! 이 시대 진주眞主는 김유신이었다. 진덕왕시대 김유신의 권위는 절대지존이었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언터처블 그것이었다. 

 

실제 삼국사기 진덕왕본기는 진덕왕본기가 아니라 김유신본기다. 내 말이 맞는지는 진덕왕본기 훑어보면 안다. 

 

그런 김유신은 진덕왕 5년(651) 2월에는 지금의 기재부에 해당하는 품주稟主를 지금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는 그 자리에다가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그 장관 중시中侍로 앉히니, 이렇게 해서 모든 국가기밀을 아예 제도로 그 수하게 두게 된다. 죽지는 김유신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진덕본기? 유신본기? by 여송은

 

애초에는 공포정치로 집권했으나, 원로들을 내세우고, 이어 국가정보를 장악한 김유신은 마침내 진덕이 쓰러지자 그가 애지중지 다음 타자로 키운 김춘추를 앉히니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이다. 그의 즉위 내력을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는 여러 신하가 애초에는 이찬 알천閼川한테 섭정을 요청했지만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德行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해서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거 곧이곧대로 믿을 놈 없다. 다 쇼다. 사전에 계획한 쇼다. 기획자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김유신이다. 김유신이 기획 연출 주연한 드라마다. 

 

진덕이 쓰러지자 김유신은 다시금 원로원회의를 소집하고는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물론 원로들한테 생각들을 물었을 것이나, 원로들이 바보인가? 다들 "유신공 뜻을 말씀해보시지요, 우린 공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할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자리에서 다음 보위는 김춘추로 결딴나고 말았다. 


말 일 들으마 죽는데이 by 여송은

 

이 대목이 같은 삼국사기 권 제42 열전 제2 김유신 中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이 재상宰相인 알천閼川과 논의해 김춘추를 앉혔다고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실상의 폭로 아니겠는가? 

 

그랬다. 진덕왕시대는 김유신의 시대였다. 그는 칠성파의 권력자이자 실력자이며 신라의 실력자였다. 그의 손에서 왕위는 결정되었다. 진덕왕을 앉히고 그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버렸으며, 정보원장에 심복을 앉혔고, 다음 보위도 그 자신이 결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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