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김유신金庾信(595~673) 열전을 보면 그 아비 서현이 아들놈 이름을 지을 적에 중국의 유명한 유신庾信(513~581)이라는 사람 이름을 땄다 했다. 이에 이끌려 중국의 유신이 몹시도 궁금했던 적 있다.
이 유신은 중국 문단에선 소위 유미주의 열풍의 선두주자에 선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에 대한 행적과 문학세계가 궁금하던 차에 이 논문을 발견하고선 복제했으니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단행본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저 열전 기록을 취신할 때 흥미로운 점은 유신이 신라사회에 알려진 시기다. 중국 문단의 스타 유신은 동시대 신라의 스타이기도 했다.
문물교유는 그때도 즉각이었다.
(2017. 4. 24)
***
내가 이 업계에 처음 투신할 무렵에 보니 모조리 타임래그를 설정했으니, 이 대목이 내가 보기엔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각종 고고학 개설 혹은 관련 논문을 보니, 같은 문물이 중국이랑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에 출현하면 무슨 근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림잡아 50년씩 간극을 늦잡아 설정했으니
그리하여 중국에서 그것이 출현한 시점을 서기 100년이라 치면, 그와 같은 유물이 한반도에 출현한 곳은 서기 150년, 그런 유물이 일본에 출현한 지점 유적은 서기 200년으로 보는 식이었다. 그것이 고고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통용했다.
경주 조양동 고분군이 38호분을 기준으로 그것을 만든 연대가 내 기억에 기원전 1세기 말인가로 설정된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에서는 중국제 구리거울이 발견됐으니, 그와 실은 똑같은 동경이 중국에서 떼로 나온 데가 있으니, 그보다 50년 늦잡아서 무덤 축조연대를 설정한 것이다. (이건 혹 내가 창원 다호리 1호 목관묘와 헷갈렸는지 모르겠다. 대세엔 지장이 없다.)
이런 식으로 그때도 말이 되지 않는 학설이 그럴 듯한 이름으로 판을 쳤다. 그때마다 내가 그런 주장을 일삼는 이들한테 따졌다. 야! 무슨 구리 거울이 서해 바다 건너오는데 반세기가 걸리냐? 일주일이면 된다.
이후 고고학계에서도 그런 주장들을 슬그머니 써먹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구시대 유물로 완전히 폐기되었다.
부여 왕흥사지 목탑 터에서 제조 연대가 확실한 중국 동전이 나온 적이 있는데, 목탑을 만든 연대랑 동전 제조 연대가 차이가 없었다. 그때 내가 불특정 한국 고고학도들을 향해 따졌다.
"봐라 동전이 오는 데 무슨 반세기가 걸리니?"
한 사람도 말이 없더라. 뒤에서만 쑥덕거렸겠지만...
하긴 그 이전에 이미, 무령왕릉 발굴에서 문물교류가 리얼타임임이 유감없이 증명된 터였다.
덧붙여 김유신이 태어나던 무렵 신라 사회는 중국풍 작명이 열풍처럼 일었으니 그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보기다.
문화사 사상사를 해야 한다. 어디 빈껍데기 부여잡고 이것이 낙랑에서 왔네 어쩌니저쩌니 하는 굴껍데기 고고학은 박멸해야 한다.
그네들 스스로는 그걸 한다 자부할지 모르나 빈껍데기 환영 붙잡은 마스터베이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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