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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소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다리가 뿔라졌어요" 자묵게 해주소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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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어떤 지인 글을 보니 조선시대 소 도살에 관한 논급이 있어, 그와 관련해 내가 다룬 옛날 관련 기사 하나를 끄집어 내어 본다. 

 

 

도살 금지 조선시대 소 도살 '백태'
송고시간 2011-09-14 06:35 
<도살 금지 조선시대 소 도살 '백태'>전경목 교수, 고문서서 각종 편법 발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제 상전은 어버이의 병환이 한 달 전부터 갑자기 깊어져 의원에게 물어보니 중풍허증(中風虛症)이라 진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원은 '반드시 우황을 복용해야만 낳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금(牛禁)ㆍ주금(酒禁)ㆍ송금(松禁)의 세 가지 법금(法禁)은 실로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라 감히 이를 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제 상전은 그저 혼자 애를 태울 뿐입니다." 

 

소가 왜? 불륜의 씨앗? 


조선후기에 나온 공문서 작성 서직집인 유서필지(儒胥必知)라는 문헌에 소개된 이른바 공문서 양식 중 하나로, 위친환용전우고소지(爲親患用全牛膏所志), 곧 부모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전우고(全牛膏. 우황)를 사용해야 하니 소를 잡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인 셈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우금과 주금, 그리고 송금, 즉 소 도살, 밀주 제조, 소나무 벌채를 법률로 엄격히 금지했다.

하지만 그 시대 금지 사항을 보면 역설적으로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법까지 만들어 그것을 금지하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서 전공인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조선시대 세 가지 법금 중에서도 바로 우금을 주목해 주로 고문서 자료를 통해 법률과 실제가 얼마나 판이했는지를 파헤쳤다. 

 


전 교수가 최근 한국고문서학회에서 발표한 '소를 잡아먹기 위해 동원된 갖가지 편법들'은 중농 정책 아래서 소 도살이 금지된 조선사회가 실제는 공공연히 도살이 자행되는 사회였음을 입증한다. 


전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소 도살을 청원한 공문서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앞에서 본 부모 병환 치료를 위한 것 말고도 소 다리가 부러진 절각(折脚)이나 호랑이에게 물려 다친 경우, 돌림병에 걸렸을 때나 각종 사고나 돌연사 때, 혹은 제수용 등의 이유로 소 도살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것으로 드러났다.

전 교수는 고문서에 보이는 이런 사례를 분석하면 이런 사례는 허울일 뿐이며, 실제는 소 도살을 하기 위한 편법 부리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소가 스스로 낭떠러지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으므로 그 소를 잡게 해달라고 수령에게 청원하는 문서가 많지만 요즘도 소를 키워본 사람들은 대번 알지만 소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일은 거의 없다. 


더욱 웃지 못할 사례는 규장각에 소장된 고문서에 보이는 행태다. 

 

소가 왜 떨어져? 


어느 고을 북면 도암리라는 곳에 있는 연생원댁(延生員宅) 사내종 귀돌이 무오년(戊午年) 12월에 고을 수령에게 제출한 문서는 그의 상전댁 농우(農牛)가 한 달 전에 새끼를 낳았는데 그제 밤에 도둑이 들어 어미를 훔쳐가고 오늘 아침에는 그 새끼마저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하면서 그 새끼를 도살하게 해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전 교수는 "이 문서 내용을 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면서 "귀돌의 주장처럼 그저께 어미소를 도둑맞았다면 당연히 그날 밤 혹은 그 다음 날 아침에 수령에게 신고해야 하지만 청원서는 그런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고 죽은 송아지만 잡게 해달라는 말만 보인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조선왕조는 중농 정책을 유지하고자 소 도살을 엄격히 금지하고자 했지만, 실제는 교묘한 편법을 동원해 도살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고 결론내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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