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들이 고고학에서 빈발하는 모습을 본다. 다 같이 물을 모아 놓는 시설을 말한다. 한데 저 말들 살피면 그 양상이 천상 역전앞을 닮아서 하나마나한 말을 관칭冠稱했음을 본다. 왜인가?
정井이나 지池나 조槽나 다 근간 기능이 집수集水라, 하나마나한 말을 붙인 데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사정이 마찬가지라 아는데, 각종 글쓰기 강좌라든가 기자교육에서 역전驛前앞은 동의의 반복이라 해서 꼭 피해야 할 표현이라고 윽박하곤 한다. 그리하여 역전앞 대신 역전이라 쓰야 제대로 쓴 표현이라는 강박이 작동한다.
나는 역전앞을 동의어 반복이 아니라 강조라 본다. 역전驛前은 역 앞이라는 뜻이지만, 이건 한자어라 선뜻 그 정확한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자 해서 그에 대응하는 비슷한 말인 앞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前과 앞은 같은 말이 아니다. 뜻이 비슷할 뿐이지 같은 말이 아니다. 한자어 한국어라는 차이 말고도 그에 따른 음도 다르며, 그 발음 강약 역시 당연히 다르다.
나 역시 무의식을 제외하고는 의식으로 쓸 때는 역전이라 쓰지 역전앞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서 역전앞이 틀린 표현이라는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집수정 집수지 집수조 같은 표현 역시 틀리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고픈 생각은 없다. 외려 저런 시설들에 집수集水라는 좀 더 확실한 수식이 들어감으로써 그 의미를 한층 명료하게 해 준다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 한국어 특징 중 하나가 단음절어를 무척이나 증오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내가 보기에 거의 모든 언어에 공통하는 현상 아닌가 하는데, 단음절어는 그 자체로는 듣는 사람이 더 말이 나올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국어 앞 이라는 단음절어만 던지면, 듣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앞 뭐? 하고 되묻거니와, 앞발 앞놈 앞뒤 앞다리 등등을 말하려 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 2음절 3음절을 선호하기 마련인데, 이 점에 미뤄봐도 집수정 집수지 집수조는 정·지·조에 견주어 한층 안정감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전통시대 한적漢籍을 보면, 예외없이 井 혹은 池 혹은 槽와 같은 한마디로 표현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물론 고유 명사의 경우 무슨 정, 무슨 지, 무슨 조 같은 식으로 쓴다만, 이렇게 한 단어로 간단히 표식하는 이유는 한자는 근간이 뜻 글자가 그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한국어 단음절 단어에 견주어 한층 명료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고학을 필두로 하는 문화재업계에서는 池니 井이니 해서 어떤 표현이 맞니 틀리니 하는 장면도 더러 보거니와, 조선시대 고문서 봐라. 그냥 물만 모아 놓으면 그냥 池이며 우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경우에 井이라 쓰지만,
그렇다 해서 그 우물이 池가 아닌 것도 아니다. 지금은 연못이니 저수지貯水池니 해서 뭐 다르다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듯하지만 그냥 池 하나로 충분하다.
벽골제碧骨堤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이 뭐 특별하다 여기는 사람 많지만, 웃기는 소리다. 벽골제는 그런 저수지를 막은 제방을 말할 뿐이며, 그 제방이 막은 물은 연못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래서 벽골제가 막은 물은 벽골지池라 하면 그만일 뿐이다.
저수지가 다르고 우물이 다르고 연못이 다르다? 웃기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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