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 필진인 畏友 신동훈 교수께서 이 즈음 계속 문맹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주제인지를 설파하는 시리즈를 계속 중이라, 내 고향 이야기를 하려한다.
여러 번 썼지만 내 엄마 선친은 까막눈이셨다. 선친은 까막눈으로 살다 까막눈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지금은 까막눈은 아니시고 기본 한글은 비록 맞춤범은 엉망이나 쓸 줄도 알고 숫자도 쓸 줄 안다.
어머니가 까막눈을 면한 계기는 조카딸이었다. 이 조카딸이 외손녀라는 이유로 친손자에 견주어 갖은 차별을 받기는 하나 어이한 셈인지 천성이 그러한 것도 있고 해서인지 몰라도 툭하면 김천으로 행차해 할머니한테 아주 잘하는데 어느날은 보니 할머니한테 한글을 가르치고 있더라.
엄마가 까막눈을 벗어나기는 순전히 이런 조카딸 덕분이다.
문제는 김녕김씨 집성촌인 내 고향에서 소학교 문전을 가본 사람이 선친 그리고 엄마 세대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젠 선친 세대는 모조리 가셨고 엄마 세대도 거의 다 가고 몇분이 남지 않았으니 이 분들은 아주 희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까막눈이셨고 지금도 까막눈이다.
내 고향에 가례국민학교라는 지금의 초등학교가 생긴 것이 자료를 찾아봐야겠지만 1950년대 아닐까 싶은데 그래서 1950년 생인가 돌아가신 형님은 국민학교는 다녔고 면 소재지 있는 중학교인가를 다니다가였는지 아니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서였는지 돈 벌겠다고 도망을 쳐버렸다.
우리 동네가 까막눈을 면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때부터다.
예서 문제는 엄마 아버지 같은 식민지시절에 태어난 부모 세대다. 이들은 모조리 까막눈이었고 가끔 글을 한다는 분도 학생부군신위 하는 지방이나 계우 쓰는 가학 서당 교육이 전부였다.
내가 한문을 배우기까지 그래서 제사 때마다 지방 글씨는 큰아버지한테 얻으러 갔다. 선친이 작은아버지한테 양자를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제사가 독립했다.
그렇다고 큰아버지가 한글을 아셨던 것 같지는 않다. 집안에 그 흔한 명심보감 천자문 하나 없었다.
온 동네가 이랬다.
내 고향은 까막눈 천지였고 지금도 엄마 세대는 다 까막눈이다.
문맹률 혹은 그 반대편 문해률 혹은 문해력이라는 통계치를 나는 믿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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