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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짜고치는 고스톱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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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8, 2017 at 7:29 AM 글인데, 당시 지자체 선거 즈음이라,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경북 지역 어느 지자체장이 나 이제 그만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불출마 움직임을 접으라고 압력을 넣는 모습을 연출하는 장면을 목도하고는 그에 격발해서 한 줄 초한 것이다. 이 사람은 결국 그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기어이 불출마 움직임을 접고는 삼선에 도전했다가 형편없는 성적으로 고배를 마셨다.   


조선시대 어느 나주목사 영세불망비. 금성관 소재.


글자 그대로 영원토록 그 은혜 잊지 않겠다고 그 표식으로써 세운 돌덩이나 쇳덩이 같은 기념물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다. 간단히 공덕비라 부르는 일이 많다. 조선시대 지방관들을 겨냥해 그 지역 인사들이 자발로 세우는 형식이다. 하지만 그 내실을 따져보면 정치쇼다. 지방관 본인이 주동해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아니라해도 실상 그의 추인 묵인 추동 아래 세운다. 


조선시대 문집을 보면 임기제인(보통 3년이다) 수령이 교체할 시기가 되어 백성들이 이 수령을 바꾸시면 아니되옵니다 라고 해서 교체 거부운동을 했다는 사적이 드물지 않게 보이지만, 실은 관제 데모다. 나 이런 훌륭한 관리임을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지방관이 제 구실을 하기위한 절대의 조건은 실은 혹리酷吏다. 이 혹리를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 정도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가혹함은 대상이 과세층인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그 지역 토호와 지방관리들이다. 가렴주구를 일삼는 이런 지역 토호들을 가차없이 법망에 빠뜨려 일망타진하는 모습이 혹리다. 


이 혹리가 사마천과 반고 시대엔 비난과 칭송 양면성을 지녔다. 그 시대 이들이 신봉하는 절대의 신은 주공이나 공자가 아니라 상앙과 한비자였다. 한 무제 시대인가 장탕이 대표적이다. 한 제국 절대의 공신이요 절대 권력자인 주발도 상앙을 추숭하는 혹리에게 걸려들어 하마터면 패가망신할 뻔했다.


요즘 말로 이해하면 엄격한 법집행의 추상같은 검찰이라 할까? 아니면 변절 이전, 혹은 본심 드러내기 이전 검사장 때려잡던 모레시계 검사 홍준표랑 비슷하다. 


나주 금성관 영세불망비들



한데 이 혹리를 대중이 받아들이는 심리가 실로 묘하다. 그 등장은 언제나 열렬한 갈채라, 나치즘에 복무한 그 위대한 법철학자 칼 슈미트가 말한 끊임없는 갈채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사냥은 언제나 질리는 법이다. 갈채는 오래가지 않는다. 혹리는 언제나 그 자신이 단두대 이슬로 사라지는 이유가 이 물림이다.


지방관이 제 역할을 하고 대중의 칭송을 자아내는 절대의 조건은 혹리다. 하지만 혹리도 아니면서 지방통치를 잘했다 해서 영세불망비를 헌정받는 주인공들은 대체로 지역사회와 특정한 이익단체와 결합한 자라 보면 대과가 없다. 앞장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영세불망비는 오늘날 한국사회 곳곳에 살아있다. 근자 경북 지역 어느 기초자치단체장이 재선을 하고 삼선 도전을 앞둔 시점에 불출마를 선언하자 그 지자체 곳곳에 불출마 반대를 주창하는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이것만 보면 이토록 선정을 베푼 지자체장은 단군조선 이래 없다. 여차하면 불망비라도 세울 기세다.


이걸 나는 불출마를 선언한 그 지자체장이 주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가렴주구를 일삼은 지자체장이었냐 하면 그런 흔적도 거의 없다. 어쩌면 그는 우리 사회 평균의 선출직 지자체장이라 할 만하다. 


이것만 보면 조선시대 나주를 다스리던 지방관들은 전부 하해와 같은 은혜를 백성들한테 베풀었나 보다. 금성관이다.



한데 이런 그의 불출마 반대를 요란하게 거리 곳곳에 붙인 단체 면면을 보니 그가 속한 특정 교단 혹은 단체 그림자가 짙은 곳이 다수인 점이 영 거슬린다. 그들에겐 그 시장이 영세불망의 지방수령일지 모르겠지만, 시장은 종교를 초월해야 한다. 시장은 특정 교단이 파견한 총독은 아니다.


그 시장과는 이렇다 할 인연이 없기에 그에 대한 호오는 유보한다. 그렇기에 삼선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 자체도 액면대로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이를 둘러싸고 그 반대를 주창하는 플랭카드엔 내가 참으로 눈쌀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외지인인 내가 보기에도 얼굴 화끈 거리는데 그곳에 터잡은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만약 이 움직임이 혹여라도 특정 교단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런 문제가 중앙정부 곳곳에도 광범위하게 일어난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예컨대 문화재 분야를 보면 특정 교단의 대표자 파견 움직임은 더욱 노골화해서 그 수장을 자기네가 점지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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