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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명문판독기

by taeshik.kim 2019.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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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좌대 명문. 개원開元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번지 관룡산觀龍山, 혹은 구룡산九龍山이라 일컫는 산 기슭에 관룡사觀龍寺라 일컫는 불교사찰이 있으니,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 말사인 이 사찰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나, 경내에 지정문화재가 밀집해 그 녹록치 않은 역사성을 증언한다. 


그런 성보문화재 중 용선대龍船臺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라는 불상 하나가 있다. 사찰 경내를 벗어난 용선대라는 바위 혹은 암반 위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자리에 위치한 이 불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성내력을 알 수 없었으니, 그런 가운데서도 그 양식으로 보아 9세기 신라 불상이라는 통설이 암암리에 통용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이르러 이 불상이 8세기 초반 통일신라시대 흥성기에 만들었다는 조성기가 다름 아닌 이 불상 대좌에서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획기를 맞게 되었다. 아래 연합뉴스 기사는 당시 이를 직접 조사한 내가 작성한 것으로, 그 명문銘文은 내가 직접 확정했다. 


이런 발표는 미술사학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물론 개중 어떤 이는 못 믿겠다며 반론을 편 이도 없지는 않으나, 시기와 질투에 다름 아니다.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가 발표해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한테 빼앗기고 말았다는 그 질투와 시기에 지나지 않는다. 


어슬픈 양식론은 깨졌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2009.07.13 07:00:04

엠바고 1차 : 2009.07.13 07:00:00


창녕 용선대 석조불상 722년 무렵 제작판명

'개원 10년' 새긴 명문 발견, "불상 기준작" 


(창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 기슭 관룡산(해발 739.7m) 정상 부근의 용선대에 있는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95호)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22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이 불상의 팔각형 좌대(座臺) 한쪽 측면에서 불상 제작 연대를 나타낼 가능성이 큰 명문(銘文.새김글자)이 보인다는 김선덕(44) 서진문화유산보존연구소장의 제보를 바탕으로, 연합뉴스가 문화재위원이자 불교미술사 전공인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 미술사학자인 문화재청 인천공항 문화재 감정관실 이송란 박사 등과 함께 11일 현지 조사를 통해 명문을 확인하면서 드러났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현지 조사결과 명문은 세 줄에 걸쳐 '開元十../月卄日(?)../成內..'이라는 글자로 잠정 판독됐고, 조사단이 제공한 사진으로 정밀 판독을 시도한 한국서예사 전공 손환일 박사는 '開元十../月卄五../成明..'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나머지 글자는 마모가 심해 전체적인 맥락을 잡기는 힘들지만 "개원 10년(722년)..월 25일에..(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개원(開元)은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서기 722년이다.


최성은 교수는 "그동안 이 불상은 막연히 통일신라시대 불상 정도로만 알려졌고, 일부 불교미술사학자는 양식적인 특성에 주목해 9세기 무렵 작품이라는 견해를 제시했을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명문 발견을 통해 이 불상이 제작된 연대가 개원 10년, 또는 개원 10년에서 개원 19년(731년)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8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또 다른 기준작을 확보하게 됐다"면서 "특히 8세기 전반 석불 중 좌상으로는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 된다"고 최 교수는 평가했다. 


8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가 알려진 사례는 입상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719년)과 같은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720년) 정도에 불과하다. 8세기 중ㆍ후반 작품으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석불은 석굴암 본존불 좌상과 석남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766년), 김천 갈항사지 석불좌상(758년 무렵)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최 교수는 이 용선대 석불좌상이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이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고 무릎 위에서 그친 점은 7세기 후반 작품으로 생각되는 팔공산 군위석굴 삼존불상의 본존상과 동일하고, 부은 듯한 눈두덩과 도드라지게 양각한 대좌 앞면 주름은 감산사 석조미륵불입상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또 좌대 상대(上臺) 앙련석은 두껍고, 삼엽문(三葉文.이파리 3개)을 기본으로 하는 연화문(蓮花文)을 새겼으며, 팔각형 중대석의 각 면에 위, 아래로 긴 안상(眼狀.눈 모양)인 장식을 표현한 점은 이후에 등장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고 최 교수는 덧붙였다. 


이 불상은 전체높이 318cm 에 불상 높이 189cm, 좌대 높이 129cm다. 


한편, 최 교수는 이번 조사 성과를 오는 18일 오후 2-6시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열리는 신라사학회 제85차 학술발표회를 통해 공개하는 한편, 문화재위원 자격으로 문화재청에 용선대 불상에 대한 정밀조사를 요청할 예정이다. 

taeshik@yna.co.kr

(끝)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2009.07.13 11:42:58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명문판독기>

용선대 석불상 제작연대 판명


(창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5월말께 보존과학 전문가인 김선덕(44) 서진문화유산보존연구소 소장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며칠 전에 창녕 군청 김주란 학예사와 함께 창녕 관룡사를 다녀왔는데, 용선대 석조불상 대좌에서 명문(銘文)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잘 읽히지는 않지만, 불상 조성 내력을 기록한 조상기(造像記) 같다. 첫줄에 '開자가 보이고 十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그 중간 글자는 아마도 '元'자 같은데 자신이 없다. 직접 내려가서 확인해 보라"는 말을 남겼다. 

김 소장이 화왕산 기슭에 자리잡은 관룡사를 찾은 까닭은 사찰측 요청으로 이곳에 소장된 지정 문화재의 보존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이에 기자는 대뜸 "그런 명문이 있는데, 더구나 그 불상이 보물로까지 지정돼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명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김 소장이 전화 통화 직후 이메일로 보낸 문제의 명문을 촬영한 사진을 두어 장을 보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명문은 육안으로 흔적을 더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글자들은 흔적이 너무 희미했다. 다만 육안 판독과 포토샵 작업 등을 통해 조상기 명문이 세 줄에 걸쳐 확인되며, 첫줄은 김 소장 말대로 '開○十'(○은 미판독 글자 표시)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으며, 둘째 줄에서는 '月'이라는 첫 글자가 비교적 또렷한 가운데 그 뒷글자는 '二' 정도로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셋째줄은 첫글자가 '成'이 비교적 완연한 가운데 두번째 글자는 흔적은 있었지만, 무슨 글자인지 종잡기가 어려웠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이 불상을 언제, 누가, 무슨 인연으로 만들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조상기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다만 조성 주체나 조성 인연 부문의 해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상기 중간 이하 아랫부분이 완전히 훼손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관건은 첫줄 첫 대목 '開○十'의 가운데 글자인 '○'에 달렸다. 이 글자가 어떤 글씨로 판독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는 실로 막연하게 '통일신라시대' 혹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만 추정하던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만든 시기가 확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연합뉴스는 문화재위원이자 불교미술사학자인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와 고려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미술사 전공 주수완씨 등과 함께 주말인 지난 11일 현장조사를 나서게 됐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각자의 일정을 고려해 어렵사리 잡은 날짜에 현장조사에 나섰지만, 여건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마 기간인 데다, 마침 전날 기상청에서는 남쪽에 머물던 장마전선이 북상해 남부지방에는 11일 오후에는 비를 뿌리겠다고 예보했기 때문이었다. 발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오전 10시쯤 관룡사에 도착한 일행은 대웅전 왼편에 선 '480m'라는 이정표가 안내하는 화살표를 따라 용선대를 찾아나섰다. 


당장에라도 비를 뿌릴 듯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날은 푹푹 쪘다. 20분 정도를 오르니 용선대라는 깎아지른 듯한 방형(方形) 바위가 나타나고, 그 위로 우람한 불상이 관룡사 쪽을 향한 채 정좌해 있었다. 


용선대에 오르니 불상 뒤편 저 너머 화왕산으로 화왕산성 성벽이 드러났다. 최근에 보수했기 때문인지, 성벽은 멀리서도 고색(古色)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현대식 성곽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성벽을 보호한다며 시도한 성벽 보수가 외려 성벽을 파괴한 것은 아닌지, 마음 한쪽 구석이 영 개운치 않았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앙련

 


마침 주말이라 용선대에는 등산객으로 북적거렸으며, 그들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각종 과일과 쌀을 공양물로 지고 온 중년 여성 2명이 석조불상을 향해 거듭된 108배를 올렸다. 


이곳 창녕에 산다는 이들 중 한 여성은 "오늘 오후 2시에 우리 아들이 공무원 시험을 치는데 부처님께 합격시켜 주십사 하고 기도를 드리는 중"이라고 했다. 


불상은 주변 풍광을 압도할 만한 자리를 차지한 데다, 그 풍격 또한 여타 통일신라시대 석불 못지 않았다.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팔각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이라는 수인(手印.손모양)을 한 석가여래가 앉은 모습이었다.   


다만 그 자세에서  이상한 점은 이런 높은 곳에 있는 석불이라면 당연히 아래쪽 계곡이나 마을을 조망해야 할 터인데, 정작 이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은 관룡사라는 사실이었다. 


마침 용선대에 오른 어떤 중년 남성 등산객이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몇십 년 전인가 언제 관룡사에서 이 불상을 다시 이 자리에 놓으면서 방향을 사찰 쪽으로 틀어놓았다고 들었다"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부처님은 사부대중을 내려다보셔야지, 어떻게 사부대중은 외면한 채 절을 쳐다볼 수 있느냐"며 분개하기도 했다.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



팔각 대좌 중에서도 조상기가 발견된 위치를 볼 때, 이 등산객의 불평은 그럴 듯했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불상이 계곡 아래를 내려다 본다고 했을 때, 조상기가 발견된 곳은 정확히 그 뒤쪽이기 때문이다. 불상이 현재는 관룡사를 향한 까닭에 조상기는 석가여래 왼쪽 측면 아래에서 발견된다. 


대좌 중에서도 조상기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찾느라고 한동안 허둥댔다. 다시금 명문이 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만 했다. 


허둥대다 겨우 찾은 조상기 중에서도 세심히 살펴보니 '開'나 '十', '月'과 같은 글자만 비교적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핵심인 '開'자 뒷글자는 '元'인 듯도 하지만, 아랫부분만 그나마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고, 윗부분 '一'자는 이미 훼손된 상태였다. 


여름 대낮에 플래시를 비춰보고, 물을 뿌려보고 했지만 더 이상 뾰족한 수가 없었다. 탁본을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이 불상은 보물인 까닭에 문화재위원회와 문화재청의 승인, 허가 없이는 탁본은 시도할 수 없었다. 


관룡사 약사전 석조여래좌상



그러다가 비가 올 때를 대비해 기자가 가져간 검은색 점퍼를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게 해서 점퍼를 조상기가 발견된 대좌 부분 위쪽에 대고, 빛을 최대한 차단한 다음, 얼굴을 그 점퍼 안으로 쏙 들이밀었더니, 신통방통하게도 흔적이 남은 글자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글자인지 너무도 완연하게 드러났다. 


점퍼 안에 고개를 들이민 상태에서 기자가 외쳤다. 


"'元'자다." 


조상기 첫 구절 첫 대목이 '開元十'임을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개원'(開元)은 당 현종 때 사용한 연호로 개원 10년은 722년이니, 신라로서는 성덕왕 재위 21년째가 된다. 


다만 그 아랫글자들은 이미 깨져나갔으니, '開元十' 아래에는 '開元十' 이후 '開元十九'(731)라는 글자가 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뒤에는 햇수를 의미하는 '年'이나, 이 무렵에 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載'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이를 잃어버린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빠르면 722년, 아무리 늦어도 731년에는 만들어졌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관룡사 대웅전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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