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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기자? 기뤠기?

넌 농촌 출신이라 데모꾼이라 해서...

Taeshik Kim June 11, 2017 


언젠가 이런 말을 쓴 적 있다. 진짜로 가난한 사람은 혁명을 못 한다고. 이는 실제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찢어지리만치 가난한 농민의 아들인 나는 천성이 그러했다.


한데 세상이 참말로 웃기게도, 세상은 나를 그리 보지 않더라. 


이한열 노제. 이 현장에 나도 있었다. 이애주 춤은 지금도 기억에 남았다.



나는 1993년 1월1일자로 지금의 연합뉴스 전신인 연합통신 기자로 공채 입사했다. 연합뉴스는 지금도 그러한데 그때도 기자직을 서울주재 기자와 지방주재 기자, 그리고 사진기자 세 부류로 나누어 선발했다.


내가 합격한 그해엔 지방기자직은 없었고, 서울주재와 사진기자만을 뽑았다. 결과 10명이 기자직으로 합격했으니, 개중 2명은 사진기자였다. 


서울주재 펜대 기자직 8명 중 나를 포함한 2명은 느닷없이 지방주재로 발령나, 나는 부산지사로 가고, 다른 한 친구는 창원주재로 발령났다.


아무리 민간업체 신입사원 선발이 나이롱 뽕이라 해도, 애초에 공고에 없던 지방주재로 발령냈으니, 막상 지방주재를 받아들이는 조건에 따른 합격 통지에 나는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기자는 되고 싶었고,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6.10만세운동 당시 명동성당. 아마 이 자리도 내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내가 합격한 이유를 조금 나중에 알았다. 나도 모르는 당시 중역진 중 한 분으로 아주 친한 친구놈 아버지 절친이 계셨던 것이니, 그 분이 힘을 써서 나를 구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부터 다시 얼마 뒤, 당시 최고경영자에게 직접 내 얘기를 들었다. 그 사장님이 날더러 그랬다.


"넌 데모꾼이지만, 성적이 좋아서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성적이 좋으면 뽑으면 그만이지 지방으로 쫓아보낼 건 뭐란 말인가? 


그 무렵 내 채용을 둘러싼 다른 얘기도 들었다. 종합하면, 내 전력을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 자식이니, 면접을 마친 경영진이 나를 데모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어찌할까 논의하다가 당시 중역회의에서 사장이 물었더랜다.


"혹시 김태식 아시는 분 계세요?"


이때 나를 구제해준 그 상무 이사분이 "제가 압니다"라고 해서 나를 지방발령하는 것으로 낙착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난 그 분을 면접시험 그날 처음 뵈었다.


나는 데모꾼과는 전연 그리가 멀었지만, 세상은 날 그리 보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 경험이다.


그래서일까? 


세세한 것들을 기억나지 않으나, 또 다른 친구들 면접에서도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내 면접 때는 온통 노조 얘기였다. 노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대학생 데모를 어찌 보느냐 등등이었다. 


87년 6월 연세대 시위. 이때는 아마도 저 뒤쪽 어딘가에 어슬렁거렸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전에 얘기를 듣지 않은 바는 아니며, 나름대로 모범답안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경영진이 달가워하지 않을 답변을 했단 기억만 있다. 그래서 데모꾼도 아닌 나는 데모꾼으로 찍혔나 보다 하고 있다.


참 웃긴 세상이다. 


*** 추기 


부산지사 발령과 그에 따른 그쪽 생활 1년은 나한테는 지옥보다 심했다. 랭보야 지옥에서 한 철만 보냈다지만, 난 1년을 보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기로 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왜 엉뚱한 사람을 쳐박았던가?


나는 지금도 분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