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37)
절구(絶句) 아홉 수 중 다섯째
[명(明)] 유기(劉基) / 김영문 選譯評
홰나무 잎 어둑어둑
낮은 담장 덮었고
미풍에 가랑비 내려
보리 추수 날씨 춥네
어찌하여 한 해 석 달
봄날의 경치는
한가한 창문 아래
낮 꿈보다 짧을까
槐葉陰陰覆短牆, 微風細雨麥秋凉. 如何一歲三春景, 不及閑窗午夢長.
봄이 왔는가 싶더니 금방 여름이다. 찰나 같기가 선잠보다 더하다. 비단 봄뿐이겠는가?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돌아보니 금새 반세기요, 금세 칠십이다. 짙은 녹음과 소나무 숲으로 그 찰나를 극복하고자 몸서리친 승려들이 잠들었다. 남가지몽(楠柯之夢)을 이처럼 훌륭한 시로 풀어냈다.
(2018.05.20.)
첫째 구 ‘홰나무[槐]’와 마지막 구 ‘낮 꿈[午夢]’이란 시어로 미루어 보건대 이 시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을 모티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남가일몽’은 당나라 이공좌李公佐의 전기소설傳奇小說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을 근거로 한 고사성어다.
『남가태수전』에서 주인공 순우분淳于棼은 자신의 집에서 친구들과 주연을 즐기다 술에 취해 잠시 낮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홰나무 뿌리 근처의 개미구멍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대괴안국大槐安國이란 나라가 있었다. 순우분은 괴안국 국왕의 사위가 되어 남가군南柯郡 태수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보니 아직 해도 다 넘어가지 않은 석양 무렵이었다.
이 모티브로 이 시를 비춰보면 홰나무 녹음이 우거진 담장 발치에는 개미굴이 있음에 틀림없다. 또 보리밭에 가랑비 내리는 늦봄 대청에서는 또 한 명의 순우분이 낮잠[午夢]에 빠져들어 있을 터이다. 그가 낮잠 속에서 평생토록 온갖 호사를 누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이 시의 짧은 봄날 이면에는 화살처럼 흘러가버리는 인생의 꽃시절[花樣年華]과 인생무상으로 마감하는 부귀영화의 화면이 중첩되어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덧없는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漢詩 & 漢文&漢文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처님은 샤워를 좋아해 (0) | 2018.05.22 |
---|---|
비 온 뒤 우후죽순 같은 벼 (0) | 2018.05.21 |
아침엔 흐드러진 꽃이 저녁이면... (0) | 2018.05.21 |
조화옹 반딧불이 (5) | 2018.05.20 |
시골길 가다보니.. (0) | 2018.05.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