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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청와대는 경복궁 후원이라는 역사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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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역사적으로 경복궁 후원…"고종이 창덕궁 본떠 조성"
박상현 / 2022-03-17 15:29:54
건물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헐려…"이전하면 복원 통해 역사성 회복해야"

청와대는 역사적으로 경복궁 후원…"고종이 창덕궁 본떠 조성"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용산이나 광화문에 새 집무실을 두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면서 기존 대통령 관저와 업무 공간이 있는 청와대 부지의 역사성에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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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 기준으로는 남경(南京)인 지금의 서울은 한수漢水 북쪽에 대낮 태양을 남쪽으로 마주하는 곳에 위치한다 해서 한양漢陽이라 칭했으니, 신왕조 개창과 더불어 우여곡절 끝에 이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그 정궁으로 지금의 백악 남쪽을 확정하고는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했으니, 이곳을 정한 이유는 무엇보다 돈 때문이었다.

새로운 왕조 개창, 도읍 확정, 정궁 건설은 무엇보다 국가 재정을 휘청케 하는 막대한 돈을 요구했으니, 새로운 도읍 새로운 왕궁 건설은 그에 따른 제반 준비 과정에서 막대한 재물을 요구했으니, 예컨대 이곳을 점거한 사람들과 집을 비롯한 터전이 있다면 그것을 다 보상해 주어야 했다.

따라서 신왕조 수도, 특히 그 정궁은 무엇보다 사람이 없는 황무지 같은 데를 골라야 했으니 그래야 토지보상비가 적게 들었다. 이 경복궁을 중심으로 일정한 구역을 city wall로 둘러친 조선왕조는 이른바 풍수설에 따라 각종 개나발과 설레발을 쳤지만 말짱한 거짓말이라, 돈이 적게 드는 곳이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정하고 보니, 청룡 백호 신무 주작이니 하는 사방신을 덧보태어 좌청룡 우백호니 하는 개설레발을 만들어냈으니 언제나 신왕조 개창에 따른 그 이델로그를 만들어내야 했던 신권력은 그것을 신화로 포장해야 했으니 이때 제격인 무기가 바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 후한시대 한창 극성을 이룩한 참위讖緯를 꺼집어 내어서는 신왕조 개창이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개나발을 치니 용비어천가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바로 이런 참위가 빚어낸 일대 사기극이었다.

옛 한국일보 자리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경복궁 



지금의 경복궁 자리는 경복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상태가 어떠했는지 확실한 문헌 근거는 없다. 다만 그 편린을 추스리고 나아가 경복궁 일대에서 진행된 활발한 발굴성과에 의하면 황무지에 다름 아니었으니, 기껏해야 고려시대 문화 흔적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밀집도는 현격이 낮아 건물이라 할 만한 것으로 변변찮은 것은 아주 없으니 간단히 말해 경복궁 창건 이전 경복궁은 사람 사는 곳은 아니었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이곳이 홍수 다발 피해지역인 까닭이라 농지라 해도 계절 농사밖에 되지 않는 곳이라 걸핏하면 청계천이며 백악 등지에서 흘러내린 폭우는 이곳을 물바다로 만들곤 했다.
한데 이런 사정이 경북궁 뒷문, 그러니깐 백악산 바로 아래 기슭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가면 확연히 달라지니, 이곳이 바로 고려시대 도시 중심구역이라 그것을 일러 남경이라 한다. 다만 이 남경은 여직 그 실체를 제대로 드러낸 적이 없으니 경무대니 청와대가 들어서는 바람에 발굴다운 발굴이 이뤄지지 아니한 까닭이다.

하지만 이곳이 주거 밀집지역었음은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아는 일이니 모든 동네 모든 도시는 평지가 아니라 산과 평지가 만나는 구릉지대에 밀집하는 까닭이다. 왜 그런가? 홍수 피해 우려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사대문 안 경복궁 일대에서 유일하게 홍수에 안전한 곳이 지금의 청와대란, 인왕산 아랫마을 정도에 지나지 아니한다.

남산 기슭도 있지만 이 남산 기슭은 사대문 안을 기준으로 보면 북향이라 그닥 인기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옛 한국일보 자리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그 기슭. 왼편 아래가 경복궁이다. 


조선왕조는 경복궁을 고려시대 남경 바로 앞에다가 지었다. 그곳에 짓고는 그 뒤안, 그러니깐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비우는 정책을 썼으니 임금이 있는 뒤꼭지에 신민이 살 수는 없는 까닭이다. 왜? 북쪽 정중앙에 위치한다 함은 그 자리가 곧 제왕의 자리라는 뜻이어니와 백악산이야말로 천문으로 보면 바로 하늘의 하늘,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 자리라, 그곳에 임금이 아닌 다른 그 어떤 신민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까닭에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 후원으로 남게 된다. 후원이란 무엇인가? 뒤안이다. 다만 이 후원이 경복궁 다음 그 밀집을 완충하고 혹은 다른 여타 소요에 대비할 이궁離宮으로서의 창덕궁 등등이 생겨나면서 그에 조성한 이궁의 후원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으니, 경복궁 뒤안은 실상은 개활지에 다름 아니었으니 멋대가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한동안 중건이 되지 아니한 까닭은 딴 게 없다. 정궁이라 하지만 멋대가리가 없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그에 따른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 까닭이었다. 그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겁없이 뛰어든 이가 이하응이었다.

청와대가 경복궁 후원임은 칠궁七宮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지도 한 장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궁궐 뒤안인 까닭이다. 뒤안이 곧 후원인 까닭이지 기타 우수마발은 필요없다.

문재인 정부를 갈아엎을 윤석열 정부가 청와대를 비우고는 국민 시민한테 돌려준단다. 돌려준다는데 국민 시민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에 따른 막대한 사회 제반 비용 문제 등등으로 이런저런 구설이 오가기도 한다. 그걸 찬성하는 쪽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그 당선 단계에서 눈엣가시로 여긴 이들은 이것도 못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각종 요설로 그 부당함을 외치곤 한다.

내가 요설이라 하는 까닭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 초기 단계에서 역시 같은 방침을 발표했을 적에는 꿀먹은 뭐마냥 암말 없는 모습으로 동의 찬동하다가 이번에는 냅다 질러버리는 그 부당성을 착목한 규정이니 순수발로에 따른 이설 제기는 타당하다고 나는 받아들인다.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집무실로 청와대를 비우기로 하자, 냅다 잘 걸렸다고 그걸 탐내는 움직임 역시 곳곳에서 포착된다. 너도나도 침 좀 발라보겠단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청와대는 경복궁 후원이라는 역사성을 저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그 활용 계획 역시 경복궁 후원이라는 역사성에 철저히 기반해 입안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덧붙여 그 역사성에서 현대 한국정치사 역사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시종일관해서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 후원이라는 역사성과 더불어 그 정치상징성을 아울러 고려한 재설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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