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찍은 인경책 1천270권, 123년만에 햇볕 쬔다
양정우 / 2021-08-05 12:06:00
14일 해인사 경내서 바람 쐬고 볕에 말리는 '포쇄' 행사
요새 해인사 움직임이 심상찮다. 부쩍부쩍 대중 앞으로를 선언하면서 파격 행보를 거듭 중이어니와, 그 일환으로 팔만대장경판을 일반에 전격 공개하기 시작한 데 이어 이번에는 이곳에 보관 중인 그 인경판 전체를 해인사 마당에 내어놓고는 볕에 쬐고는 말린다.
이 무렵 볕이 좋은 날을 가려 책이나 옷가지를 볕에 내어놓아 습기를 제거하고 좀을 없애는 일을 포쇄曝曬라 하거니와, 같은 뜻인 두 글자를 연이어 씀으로 그 의미를 더욱 강화하고자 했으니, 曝건 曬건 모두 그 의미를 표시하는 부수자로 날 일日자를 쓴 데서 엿보듯이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햇볕 쨍쨍한 날에 습기나 좀이 슨 물건을 말린다는 뜻이다.
때로는 사람조차 이렇게 해서 볕에 말려 죽이려고도 하는데, 그 대상이 주로 무당이었던 까닭에 이런 일을 폭무暴巫라 하거니와, 애초 曝이라는 글자는 없었으니 그것을 의미할 적에는 暴이라는 글자로 썼다가 나중에는 이 글자가 주로 사납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는 바람에 그 중의성을 피하고자, 햇볕에 내리쬐는 일을 의미할 적에는 그에다가 日자를 부수자로 붙여 曝라 일컫기 시작했다.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판 전부를 종이로 찍어내 꿰맨 책 전질이 소장됐거니와, 그 전체 분량은 1천270책이라, 다만 두어 가지 유념할 대목이 있으니, 첫째 이때 말하는 책은 발륨 volume이라는 사실이라, 개별 낱권을 말한다. 요새 우리한테 익숙한 말로는 권卷이다.
다만 옛날을 책을 세는 단위로는 권卷과 冊이 있어, 권이란 요새 말로는 chapter이라 하며, 冊이 실은 volume에 해당한다. 팔만대강경은 권, 그러니깐 챕터 기준으로는 6천800권에 달하는 초초거질이다.
두번째로 1천270책이라 하지만, 전질에서 대략 70권 내지 100권이 탈락됐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내가 자세히 내막을 추적치 아니했거니와, 애초 찍을 적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저만한 분량이 소실된 것이다.
세번째로, 이번에 포쇄하는 판본은 1898년 상궁 최씨라는 사람이 발원해 찍어낸 4부, 곧 set 중 하나로, 당시 이를 찍어내 책으로 엮은 최씨는 삼보사찰로 꼽히는 해인사와 통도사와 송광사에 각각 전질 1부씩을 보내고, 나머지 1부는 쪼개서 전국 각 사찰에 나누어 봉안했다. 이것이 결국 부처를 섬기는 행위 일종인데, 이런 일을 발원이라 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힘으로 상궁 최씨는 저런 담대한 일을 했을까? 덧붙이건대 저런 일은 말이 쉽지, 초초거대재벌 아니고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우선 저런 일을 하려면, 내가 찍어낼 테니 니들 잔말 말고 따라야 한다는 위엄이 있어야 하거니와, 이는 상궁 최씨가 얼마나 위력이 막강했는지를 증명한다.
나아가 이 여인은 단순히 권력만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부자였으니, 요새 기준으로 빌 게이츠 급이었다. 저만한 분량을 책으로 찍어내려면 기둥 뿌리 하나가 아니라, 지금의 서울 강남 고층건물 몇 채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저에 소비되는 막대한 종이만 해도 대체 어디에서 어케 조달한단 말인가? 저걸 판각하던 그해 조선은 종이 품귀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 막대한 비용을 상궁 최씨가 댔다. 상궁 최씨는 누구인가?
경상북도 김천에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라는 유서 깊은 사립학교가 있으니, 그 운영주체는 송설학원이다. 이 송설松雪은 설립자 호를 딴 것인데, 그가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 사람이다. 생평 독신으로 지낸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거부였으니, 생평 독신으로 지내며 오로지 부처님을 섬긴 이 할매가 말년에 당신 재산 전부를 털어 송설학원을 만들고 김천고보를 세웠으니, 이 여인이 바로 상궁 최씨다.
송설당은 구한말 이래 식민지시대에 걸친 불교의 울트라슈퍼단월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찰이 없다시피 할 정도다. 김천 현지에서는 고보 할매 혹은 고부 할매라 지금도 전승하니, 그의 고향이 전라도 고부였고, 그런 할매가 김천 고보를 세웠으니 고보 할매라 한다.
한민족 5천년 역사를 통털어 이만한 여성 교육사업가 없다. 내 모교 할매를 뜻밖에 다시 만나니 그에 감발함이 없을 수 없어 몇 마디 붙여 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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