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용인시청 학예연구사 이서현 선생이 공무원, 개중에서도 학예연구직 공무원 봉급 연봉표를 올려 생각난 김에 일전에 두어 번 다른 자리에서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얽힌 신용불량 기억 일화 하나를 적어둔다.
나는 1993년 1월 1일 연합통신(현재는 연합뉴스로 개칭) 기자직 공채로 입사했으니, 그 전에는 아주 잠깐 한국관광공사에 적을 둔 적이 있어, 정확한 기록은 찾아봐야겠지만, 졸업 직전인 1991년 12월 어느날, 이 역시 공채 시험을 통해 한국관광공사에 입사했다.
4개월인가 5개월인가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말았으니, 그러고는 기자 한번 되어 보겠다 해서 백수 생활로 접어들었다가 용케도 그해 연말 연합통신 기자직 시험에 합격해 실업자 생활을 청산했다.
그러므로 나는 1992년 4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8~9개월을 백수였다.
기자생활 중에는 원치 않는 해직기자가 되어 2년에서 조금 못미치는 기간 동안 백수가 된 적이 있으니, 대학 졸업 무렵 대략 3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저 두 기간이 백수였다.
같은 백수인데 금전이라는 측면에서 사정은 많이 달라 해직기자 생활에서는 생활고를 겪은 적은 없다.
나중에 복직하면서 결국 다 토해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퇴직금을 챙긴 데다, 이래저래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어 용돈은 그런 대로 벌어서 생활했다.
반면 91년 백수생활은 아주 달라서 그 기간 나는 내내 신용불량자였으니, 무엇보다 카드가 정지되어 극심한 내핍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나는 연세대 신촌 캠퍼스 앞 굴다리 인근 허름한 집에서 지금 생각하면 참혹하다 할 수밖에 없는 자취생활을 했으니, 달랑 불알 두 쪽 달고 상경하고는 적어도 군복무 이후 복학하고서는 과외로 번 돈으로 등록금 내고 하숙비까지 대는 생활을 했다가 관광공사 취직과 더불어 그런 생활을 청산했지만 문제는 바로 이에서 생겨났다.
지금이야 물론 달라졌겠지만, 당시 관광공사 연봉 사정이 형편없었다.
지금도 그렇다는 말이 있겠지만 그때도 공사는 이른바 신의 직장이라 해서 그런대로 선호받은 직장이기는 했지만, 이것도 공사별로 천차만별이고, 또 공사는 그 특유하는 전통이 있어 모든 체계가 공무원에 준해서 적용되었으니 그때 신의 직장이라 했지만, 빛좋은 개살구라 당시는 공무원이 박봉이던 시절이라 그에 준한 연봉체계가 적용되었다.
한데 이 망할 놈의 관광공사는 그에 더해 신입사원에 대해 수습 3개월이라는 기간이 있었으니, 이게 참말로 엄혹하기 짝이 없어, 내가 입사하던 그때 최저임금이 한달 기준 20만원일 때라, 이때 최저임금은 지금의 최저임금과는 사정이 많이 달라서 그건은 심리적 마지노선 같은 그런 느낌이 강할 때라, 실제 사업장에서 그 최저 임금이 적용되는 데는 많지 않거나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국관광공사는 수습기간 3개월간 이 최저임금을 적용했다. 간단히 말해 나는 그 수습기간 3개월 동안 매달 월급 20만원을 받았다.
다른 직장, 특히 다른 공사에 들어간 지인들을 수소문 하니 이런 데가 없었다. 오직 관광공사만 그 지랄을 했다. 그땐 그렇다 하겠지만, 나 같이 가진 것 없이 오로지 직장 생활 봉급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죽을 노릇이었다. 그 3개월을 어찌 버텨내느냐가 관건이었다.
86년 내가 입학 당시 연세대 등록금이 45만원이었으니, 그보다 5년이 지난 시점에 최저임금 20만원을 생각해 보면, 정말로 거지 같이 살았으며,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사람이 먹고 살게는 해줘야 할 게 아닌가? 그 살게 해줘야 조건을 관광공사는 제공하지 않았다.
내가 그 생활에 환멸하고서 이내 박차고 나선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최저임금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정식 봉급은 딱 한 달 받아봤는데 57만원이었다. 그에다가 출퇴근 시간 한 시간씩 조작해 계우 십만원 더 받았다. 예선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왜 합격한 현대자동차를 박차고 관광공사를 택했는지 후회가 물 밀듯 밀려들었다.
백수가 되고선 그 20만원 봉급도 끊어지니, 진짜로 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때는 마이너스통장? 이런 개념도 없을 때라,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찌 버텨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내 신용카드 거래는 정지되고 말았으니, 그때 관광공사 주거래은행이 신한은행이었다.
그런 거지 생활이 연합뉴스에 입사하고서 한달 만에 사라졌다.
당시엔 언론사 봉급 체계를 지칭해 하후상박下厚上薄이라 하던 시절이라, 초임연봉이 아주 센 시절이었다.
우리 공장 월급날이 그때도 아마 25일 무렵이라 생각하는데 1992년 1월 25일인가 월급봉투를 받아드는데 세상에 나, 그렇게 많은 돈을 내가 월급으로 받을 줄은 몰랐다.
그 정확한 액수가 기억에는 없지만, 암튼 관광공사 시절 그것과는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연합통신을 포함해 그 무렵 언론사들은 거개 기자직에 대해서는 6개월간 수습기간을 두어 봉급도 차별했지만, 같은 수습기간인데도 그 봉급은 너무나 차이가 컸으니 무엇보다 수습기간 월급이 관광공사 본봉보다 세 배는 넘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연합통신 입사 이래 한동안 을지로입구 한국관광공사는 쳐다도 안 본 이유가 그에 있다.
당시 관광공사는 있는 집안 자식들이 알바로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월급이 그랬다.
연합통신 입사 이후 처음으로 받은 월급으로 나는 그날로 신용불량을 청산했다.
참말로 거지 같은 날이었다.
이후 내가 말한 저와 같은 관광공사 박봉 시스템은 많이 변화한 줄로 안다. 그때 동기들로 그대로 남은 이들이 지금은 다 실장 본부장급일 텐데, 혹 저와 같은 말들이 그들한테 누가 될까 못내 저어되긴 한다만, 그땐 그랬다는 말로 들어주었으면 싶다.
그리고 나는 사정이 저랬으니 그만큼 더 절박했다고 핑계해 둔다.
아버지는 잘 만나고 봐야 한다.
행복 중에 돈 많은 아버지 만나는 일 만한 핵폭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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