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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탁상공론 박제가 수레론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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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城行幸圖화성행행도 팔폭병풍 중 마지막 제8폭 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1795년(정조 19), 조선 임금 정조가 지금의 수원 화성에 행차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정리한 華城行幸圖화성행행도 팔폭 병풍 중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이다.

구체로는 현륭원을 참배한 정조가 서울 한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라, 한강을 건너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니 

보다시피 이때 한강에는 변변찮은 다리 하나 없어 각종 목선이라는 목선은 다 동원해 그것을 고기 꾸러미처럼 엮어 다리를 맹글었으니, 한강에 왜 다리가 없었는가?

다리 만들 기술이 없어서였다. 만들면 뭐하는가?

홍수 한번 지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만들 수도 없었고, 만들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이런 다리를 배를 엮어 만들었다 해서 주교舟橋라 했지만, 나는 저런 표현을 거의 본 적 없고 대신 부량浮梁이니 부항浮航이니 혹은 부교浮橋라 했다. 물위에 붕붕 뜬 다리를 말한다. 

고주몽이 부여에서 권력투쟁에 밀려나 도망할 적에 엄리대수를 건너려 하니 자라가 떼로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어 그것을 딛고 건넜다는 고구려 건국신화가 바로 이 부교를 말한다. 

나는 앞서 다음과 같은 글을 초한 적 있거니와 
 

박제가와 《북학의北學議》를 심판한다

조선 후기 실학을 논하면서 개중 하나로 박제가朴齊家(1750~1805)를 언급하면서 그가 수레 사용을 적극 주창한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수레를 몰라 수레를 사용하지..

historylibrary.net

 
요컨대 청나라 선진 기술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그 일환으로 수레 사용을 적극 권장해야 한다는 북학론은 탁상에서 안출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거니와

무엇보다 그가 북학의北學議라는 책을 통해 주장한 저런 주장은 현실성이 없어, 조선의 현실은 전연 고려치 않은 공상론일 뿐이니 

그가 주장하는 수레 사용이 가능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스팔트 도로와 터널을 뚫어야 했지만, 그에 대한 고려없이 무턱대고 수레를 쓰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다 못해 한강에 수레가 다닐 다리 하나 변변찮은 게 없는데 무슨 수레란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더욱 정확히는 근대에 목마른 역사학도라는 자들은 저 말을 선구적이요 선진적이라 선전하며 그를 선각자로 추숭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는 냉혹히 심판해야 한다. 

누구를?

첫째는 박제가를 심판해야 하며 
둘째는 그런 박제가를 영웅으로 만든 자들을 

심판해야 한다. 

정조가 화성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배를 엮어 한강을 건널 적에, 박제가는 수레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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