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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순간포착] 숭례문을 집어삼킨 2008년의 추억

[순간포착] 억장 무너진 '국보 1호' 숭례문 화재 붕괴

송고시간 2020-02-08 08:00 

5년3개월 만에 복구공사 완료하고 국민 품으로 돌아와





모레는 문화재방재의 날이라, 그날 숭례문이 잿더미로 변했다. 


2008년 2월 10일 저녁 불길에 휩싸인 숭례문이 이튿날 새벽에는 숯덩이로 변했다. 


이 사건이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던 점은 그 원인이 방화라는 사실이었다. 



2006년 채종기에 의한 창경궁 문정전 방화



범인은 당시 만 69세 강화에 거주하는 뇐네 채종기. 10년인가 복역하고 출소한 걸로 기억하거니와, 이 영감탱이는 그보다 대략 2년전인 2006년 4월 26일 오후 5시 무렵 창경궁 문정전을 불지른 전력이 있다. 미리 준비한 신문지와 부탄 가스통 4개를 이용해 불을 지른 것이다. 이때는 다행히 관람시간이라 바로 진화되었지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채종기는 경찰 조사에서 사회 불만을 토로했다. "일산신도시 토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열받아서 그랬다". 


한데 이 영감탱이가 경악스러웠던 점은 애초엔 경복궁을 불싸지르려 했다고 진술했다는 점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그가 고령이고 피해회복을 위해 600만원을 공탁했으며, 이렇다 할 전과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300만 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추징금을 낼 여력은 없었다. 더 열받을 수밖에. 



이러는 와중에 범행대상으로 숭례문을 골랐으니, 그 방법은 똑같았다. 


그날 밤, 내부에서 붙은 불은 기둥을 타고 올라가 지붕 아래로 숨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전통기와집은 기와 밑창에다가 가연성이 대단히 높은 나무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까는데, 이를 적심이라 한다. 문제는 바로 이 적심이었다. 위로는 기와로 콱 막혀 그것을 뚫어제껴 물을 퍼붓는 방식 말고는 진화할 방법이 없었다. 


바로 앞 사진은 그렇게 불이 붙은 숭례문으로 물을 퍼붓는 장면이다. 겉으로 보면 불길이 잡힌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생각한 불길이 11일이 되면서 활활 타올랐다. 더는 걷잡을 재간이 없었다. 




이런 화재 대응 매뉴얼은 있기는 했지만, 현장에서 섣불리 결단을 못내린 점도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붕 기와를 뜯어버리고 그 아래서 잠자던 불씨를 말살했어야 했지만, 그 대응 매뉴얼이 쉽사리 작동하지 아니했으니, 그렇게 해서 초기에 진화되었다 한들, 이후에 초래할 책임 추궁도 왜 우려하지 않았겠는가?


결과가 저리 되었으니,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당시 저 상황에서 국보 1호 지붕을 뜯으라? 그렇게 해서 초기에 불길을 잡았다손 치더라도, 그때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국보 1호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느냐는 비난이 잇따를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나중에 드러났지만 대한항공 협찬을 받아 유럽 출타 중이었거니와, 현장 진화반장이 이성원 문화재청 차장이었다. 사건 발생 소식을 접하고 바로 현장에 출동한 이성원은 총력을 다했지만, 저리되고 말았으니, 이 사건은 두고두고 이성원을 괴롭히게 된다. 이른바 양심의 가책 말이다. 


그가 너무나 일찍이 훌쩍 세상을 떠났는데, 그 성격도 한 몫을 했겠지만, 저 사건 트라우마 역시 그의 이른 죽음을 부르는 큰 원인이 되었다고 나는 본다. 


암튼 그렇게 해서 불길을 삽시간에 다시 타올랐으니, 그렇게 해서 숭례문은 참사를 맞게 되었다. 




이 참사는 생중계가 이뤄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애초 화재 발생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언론이 YTN인데 지금은 상암동으로 옮아간 이 방송사는 당시에는 그 바로 옆에 똬리를 틀었으며, 더구나 그 메인 화면은 언제나 그 방송사 건물에서 저 숭례문을 비추었으니, 화재는 발생에서부터 진화 때까지 고스란히 YTN 전파를 탔다. 그 모습을 보고는 많은 시민이 발을 동동 굴렸으니, 생평 서울을 산 내 장모님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사건 발생 당시 나는 한국에 없었다. 한양대문화재연구소인가 기획하는 페르시아답사 일환으로 이란을 갔다가 테헤란공항을 떠나 인천으로 복귀하던 무렵이었다. 그 사이에 저런 참극이 빚어졌으니, 인천에 내리자마자 도로 켠 휴대폰에는 나를 찾는 부장 전화 수십통이 찍혀 있었다. 




화재 발생과 진행과정이야 사회부 경찰기자들 몫이었지만, 정작 필요한 그 순간에 문화재 담당기자가 출타 중이었으니,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지금은 멕시코특파원으로 나가 맹활약 중인 고미혜 기자가 당시 문화재 2진을 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참말로 기가 찰 정도로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