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를 읽다가>
기록상 제주 출신으로 처음 고려의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한 고유高維라는 분이 있다. 이 어른은 뒷날 정2품 우복야右僕射에 오를 정도로 출세했지만, 섬 사람으로써 겪는 차별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문종 11년(1057) 정월 정기인사의 한 장면을 보자.
기축 고유高維를 우습유(右拾遺, 종6품)로 삼았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고유는 탐라 출신이므로 간성諫省에는 합당하지 않은데, 만일 그 재주를 아깝게 여긴다면 다른 관직을 제수하길 요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우습유는 중서문하성의 종6품 관직으로, 높지는 않지만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을 담당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고유가 임명되자 중서문하성이 "탐라 사람은 사절하겠습니다"라고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문종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왕도 지역차별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들은 고유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성주星主의 자손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이건만 고려 중앙에서는 아무리 출세해도 '탐라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던 고유.....별로 멀지 않은 과거엔 참으로 흔한 풍경이었고, 지금도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이 사실만 본다면 문종이 나약한 왕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는 고려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고 상당히 리버럴한 모습을 보인 사람이었다.
같은 해 8월, 문종과 중서문하성 사이에 또 한 번의 대결이 펼쳐진다.
병인 비서성교감秘書省校勘 경정상慶鼎相을 권지직한림원權知直翰林院으로 임명하니, 중서성에서 말하기를, “경정상은 철장(鐵匠, 대장장이)의 후예로 청요직에는 합당하지 않으니 삭탈관직하기를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장장이의 후손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했다는 것도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기엔 자못 놀랍지만, 어쨌거나 중서문하성에서 "대장장이의 후손은 사절하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문종은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순무와 배추를 캐는데, 뿌리가 나쁘다 하여 잎조차 버리지 말라[采葑采菲無以下體].’고 하였으니, 대체로 그 쓸모 있는 부분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경정상의 재능과 식견은 가히 채용할 만하니, 어떻게 그 가문을 논할 것이냐.”라고 하고,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유가 이 소식을 들었으면 좀 억울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사실은 우리에게 고려시대의 여러 사실을 알려준다. 탐라 사람이 차별받았다는 것, 대장장이의 자손도 과거를 볼 수 있었다는 것.....
***
<대장장이 아들보다 못했던 탐라 성주의 자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도 있지만, 출세해도 이처럼 발목잡히는 일이 하나둘이었으랴.
"탐라 사람" 고유의 뒤에서 수군대는 이들 또한 한둘이 아니었을터.
그의 속을 누가 알랴마는, 그 아들 고조기高兆基는 아버지가 거치지 못한 청요직을 넘어 재상급 지위에 오르고 문경공이란 시호까지 받는다.
그런데 고조기 무덤은 지금 제주에 있다. 제주고씨 후손들이 지금도 극진히 모시고 있는데, 고려 전-중기 관료층이 죽고 나서 대개 개경 인근에 묻혔음을 생각하면 퍽 이례적인 일이다.
만약 그 무덤이 헛묘가 아닌 진짜라면, 그 자체가 고유-고조기 부자가 고려 관료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외로움(이랄지, 따돌림이랄지)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2024.1. 22)
#신분차별 #지역차별 #차별 #고려시대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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