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를 읽다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외국, 특히 중국 상인들이 빈번하게 개경을 드나들었다. 그런 만큼 고려 조정에서도 이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문종 9년(1055) 음력 2월 한식날, 불을 피우지 못하는 날이라 쫄쫄 굶고있을지도 모를 외국 상인들을 위해 고려 조정은 객관客館에서 거하게 식사대접을 하였다.
무신 한식寒食이므로 송宋 상인 섭덕총葉德寵 등 87인은 오빈관娛賓館에서, 황증黃拯 등 105인은 영빈관迎賓館에서, 황조黃助 등 48인은 청하관淸河館에서, 탐라국耽羅國 수령首領 고한高漢 등 158인은 조종관朝宗館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 <고려사> 권7, 세가7 문종 9년 2월
이를 보면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240명이었고 탐라 사람들이 158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 무리의 대표자를 가장 먼저 쓰게 마련이므로).
이들이 모두 상인이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지 싶은데, 탐라에서 158명이나 왔다는 게 시선을 끈다. 송나라 상인 규모의 2/3에 달한다.
그만큼 탐라가 고려와의 교역에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라고 봐야 할까? 고려시대라고 제주도가 척박하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고한'이라는 분이 높을 高(제주에서는 '사다리 고'라고도 하는)를 쓰고 있다. 분명 이때는 고려 중앙에 진출한 탐라 高氏가 계셨다. 하지만 이 고한 선생이 과연 高氏인지 아니면 그냥 성 없이 이름이 '고한'일 뿐이었는지는 좀 고민스럽다.
*** 편집자注 ***
저 당시 상단 혹은 외국 사절을 접대한 영빈관 이름이 달라서 중국 상단은 오빈관娛賓館·영빈관迎賓館·청하관淸河館, 탐라 사절은 조종관朝宗館임을 본다. 이 중에서도 탐라국 사절이 머문 이름이 심상찮다. 글자 그대로는 조종 혹은 종가에 조알한다는 뜻이다. 탐라국에 대해서는 고려가 시종 봉건제후 취급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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