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시대를 다룬 중국 사극을 보면 가끔 주인공이 황제에게 자신을 일러 "노재奴才 아무개, 황상을 뵈옵니다!"라 하는 경우가 있다.
'노재'란 글자 그대로 '종의 재주', '종이나 할 재주' 라고나 할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단어는 만주인만이 황제에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냥 한인 신하는 물론이고 한군팔기漢軍八旗 곧 만주족에 편제된 한인들도 자기를 일컬을 때는 신臣이라고만 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자기를 '노재'라 한다면?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는 청나라 시절 관료들이 황제에게 올린 문서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거기에는 황제가 친히 붉은 먹을 적신 붓을 들어 댓글을 달곤 했다.
그런데 이를 보면, 한인 관료가 '노재 아무개'라고 썼을 때 강희제康熙帝는 '칭신稱臣이 가可하니라' 정도로 지나간 반면
옹정제雍正帝는 "이 멍청한 X아..." 처럼 아주 창의적인 표현을 써 가며 비난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만주인 황제는 한인에게 '노재'를 허용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한인 관료들은 어떻게든 '노재'를 써 보려고 그렇게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나 황제의 종이 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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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이주화 선생님과 김창영 선생님이 이와 관련해 시사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다. 우선 김창영 선생님은...
노재 할 때 재는 者의 뜻일 겁니다. 굳이 우리 말로 하면 쇤네?
효장이 삼번을 치기 위해 만주 귀족의 친위대들을 불러 들이는데 나를 섬기던 이가 귀족이 되고, 그 귀족이 부리던 노예가 귀족이 되기까지 시간이 흘렀다는 연설을 했다죠.
또 한편 노비가 고급관료가 되고 섬기던 주인집이 몰락했더라도 1년에 며칠 씩 가서 노력 봉사를 해야 했고 백수인 옛 주인이 걸어가는데 노예 출신 관료가 가마나 말에서 내려 절하지 않으면 손찌검을 해도 아무말 못했다더군요.
도광제 가서야 이런 압제들이 풀린다는데..
또 이주화 선생님은
만주족끼리는 군신관계보다 주종관계가 컸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가문의 노복이 나라의 신하보다도 가까운 사이였음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라는 글을 달았다.
중국에서는 '가족'의 개념이 집안에서 허드렛일하는 노비까지 포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로 미루어 '노재'를 쓰고 싶어한 사람의 심정을 짐작할 만하다.
어쩌면, 광개토태왕비에서 백제 왕이 "이제부터 대왕의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나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졌다....너의 노예가 되겠소'라는 의미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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