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토기가 있다.
여기에는 뭔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곡식일 수도 있고, 장일 수도 있겠고,
음식물 재료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이 토기 뚜껑이 뭐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토기에는 뚜껑도 조합으로 함께 빚어 만든 것도 있다.
하지만 모든 토기가 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당수 토기 두껑은 나무였을 것이다.
나무판대기를 올려놓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은 형태가 아니었을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임금께 올리는 표에
雖不足藏之名山 庶無使墁之醬瓿
즉 소신의 책이 명산에 감추어져 보관할 정도는 아니라도
장독 두껑으로는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이 구절은 사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상한 구절이다.
장독대 하면 집 밖에 두꺼운 뚜껑을 이고 있는 장독대를 연상하고
책, 하면 종이로 만든 책을 연상한다면
장독대 뚜껑을 종이책으로 하면 과연 그게 버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 여기에 썼던 것 같지만,
김부식의 이 구절은 원래 자신이 처음 말한 구절이 아니고,
“(揚)雄以病免,復召為大夫。家素貧,耆酒,人希至其門。時有好事者載酒肴從遊學,而鉅鹿侯芭常從雄居,受其《太玄》、《法言》焉。劉歆亦嘗觀之,謂雄曰:‘空自苦! 今學者有祿利,然尚不能明《易》,又如《玄》何?吾恐後人用覆醬瓿也。’雄笑而不應。”
한서 양웅 전에 나온 이 구절을 취하여 쓴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이 구절의 뜻은 달라진다.
즉, 한서 양웅전이라면, 저 글에서 이야기 한 책은 곧 죽간으로 만든 책이라는 것을 알겠다.
죽간으로 만든 책이기에 장독 뚜껑으로 쓸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저 시대에 장독은 뚜껑을 나무 뚜껑으로 한 것도 많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는 뜻.
그건 그렇고,
김부식은 저 구절을 취하여 썼을 때
장독대 뚜껑이 되는 책은 종이책이 아니라 죽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폼나는 구절로 끌어 쓴 것일까?
김부식 정도 되는 대학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 본다.
고려시대에는
9經과 3史를 읽었다는데 여기서
9경이란 ≪주역≫·≪상서≫·≪모시≫·≪예기≫·≪주례≫·≪의례≫·≪춘추좌전≫·≪공양전≫·≪곡량전≫이며,
3사란 ≪사기≫·≪한서≫·≪후한서≫를 말한다고 하니
김부식도 한서 양웅전을 당연히 읽고 저 구절을 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말한 장독대 뚜껑으로 쓰는 책도, 당연히 죽간으로 만든 책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 Editor's Note ***
필자가 주장하는 저런 의구심을 파고드는 연구만 있었더래도 한국고고학이 지금과 같은 참상을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맨 양식 타령이나 일삼다가 날이 새고 기차를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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