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에 찍힌 압흔壓痕을 보고 해당 토기가 쓰이던 당시 어떤 곡물을 재배했는가를 유추하는 방식이 있다.
농업고고학에 있어 비할 데 없이 매우 강력한 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도대체 왜 곡물 압흔이 토기에 찍혔을까?
이것은 항상 필자가 갖던 의문인데,
상식적으로 토기가 마른 상태라면 곡물의 압흔이 찍혔을 것 같지가 않다.
딱딱하게 마른 다음 구워냈다면 거기에 뭘 담던 곡물 압흔이 찍혔을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왜 곡물 압흔이 찍혔을까?
마르기도 전에 곡물을 이미 토기에 담았다는 뜻일까?
토기를 구워내기 전에 곡물을 먼저 한 번 담아보는 단계가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 부분이 필자에게는 곡물의 종류 못지 않게 흥미롭다.
***editor's note """
토기를 굽기 전 말리는 단계가 필요한데
이 말리는 단계서 해당 곡물 짚단을 깔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저 시대 가마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노천요라
그 짚단을 깔고 그대로 태워서 구웠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박영재 선생 지적이어니와 토기 소성 과정에서 왕겨 같은 것으로 구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실험은 현대 고고학에서도 더러 하는 장면을 보았다.
왕겻불로 굽는 실험 말이다.
더불어 아래와 같은 장남원 선생 지적도 있다.
곡물 압흔이 외면에 남아 있다면 그것들을 깔거나 슬쩍 묻혀 달라붙지 않도록 하고 적재하면서 눌린 흔적일것 같기도 하죠. 훗날 영암 구림리 도기요지애서 만들어진 시유도기 중에도 표면에 식물줄기 같은 것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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