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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퇴계 전문박물관으로서의 도산서원, 문화재 보수 잘못해서 신세 조진 서원 원장

by taeshik.kim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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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어! 국민의힘 대선후보 시절 도산서원을 찾아 참배하는 윤석열


도산서원을 배알한 기문〔謁陶山書院記〕

이익李瀷(1681~1763), 《성호전집星湖全集》 제53권 기記

내가 청량산淸凉山에서 발길을 돌려 도산을 방문할 때 신택경申澤卿이 함께하였다. 반나절쯤 길을 가서 온계溫溪를 지날 적에 길가에서 멀리 서원을 가리키며 물으니, 답하기를, “노老 선생의 선대부先大夫 찬성공贊成公과 종부從父 승지공承旨公, 형 관찰공觀察公 세 분을 제사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영남 사람들은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선생의 어버이와 스승에 대해서도 모두 추중推重하고 향모向慕함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선생의 유적遺迹이 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다시 작은 고개를 지나 먼저 애일당愛日堂을 들렀으니, 바로 이 농암李聾巖이 살던 곳으로 매우 아늑하고 절묘한 곳이었다.
말 머리를 돌려 왼쪽으로 달려가 비로소 도산에 이르렀다.

도산은 선생이 늘 기거하던 별장別莊으로, 계상溪上에서 5리쯤 떨어져 있다. 계상은 선생의 본댁이 있는 곳으로, 퇴계退溪라고 이르는 곳이다. 동쪽 상류로 곧장 가는 길에 산기슭 하나가 가로막아서 도산과 통하지 않으니 선생이 늘 산 위를 거쳐서 지팡이를 짚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도산서당



대개 산과 물이 구불구불 감싸 안고 돌아 시냇물에 임하여 하나의 골짝이 펼쳐지는데, 산은 영지산靈芝山 줄기이고 물은 황지黃池에서 발원한 것이다. 또 청량산으로부터 뻗어 온 산이 물 흐름을 따라서 서쪽으로 달리다가 영지산 한 줄기와 하류에서 합쳐서 좌우에서 절하고 있는 듯하니, 이른바 동서의 두 취병翠屛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동洞은 작지만 가운데가 툭 트여서 마을이 들어설 만하니, “터가 넓고 지세가 뛰어나며 앉은 자리가 치우침이 없다.”라고 한 본기本記에서 증험할 수 있다.

선생이 손수 창건한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후인들이 이어서 서당의 뒤에 서원을 건립하여 존봉尊奉하였다.
우리들은 말에서 내려 공순히 바깥문으로 들어갔다.

서쪽에 동몽재童蒙齋가 서당과 마주 대하는데, 동몽재는 어린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곳이라고 한다. 다시 진덕문進德門으로 들어가니 또한 좌우에 재齋가 있는데, 동쪽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은 홍의재弘毅齋다.

가운데에 남쪽을 향하여 강당講堂을 두었는데 편액을 전교당典敎堂이라 하고, 당의 서쪽 실室이 한존재閑存齋다. 한존재는 원院 내에 반드시 장임長任을 두어서 그로 하여금 제생諸生을 통솔하며 항상 이곳에 거처하게 한 곳이고, 박약재와 홍의재는 곧 제생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도산서원 농운정사



우리는 홍의재에 들어가 거재居齋하는 사인士人 금명구琴命耈를 만나서 원의 규모와 지명, 민풍民風의 대개를 대략 들었다. 이어서 원노를 불러 사우祠宇의 바깥 정문을 열도록 하고 배알하는 절차를 상세히 물은 뒤에 감히 들어가니, 상덕사尙德祠라는 세 글자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또 남쪽 문을 열어 주어, 우리들이 뜰아래에서 엄숙히 참배하고 추창하여 서쪽 계단을 통해 가 몸을 숙이고 문지방 밖에 차례로 서서 사당 내 제도를 살펴보고자 하였는데, 왼쪽에 월천月川 조공趙公을 배향하는 신위만 있을 뿐이었다.

다시 서쪽 담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자 담 밖에 집 2채가 있는데, 하나는 주고酒庫라고 하고 하나는 제기祭器를 보관해 놓는 곳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마침내 추창하여 나가서 홍의재에 이르자 재 뒤에 다시 실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리켜 유사방有司房이라고 하였다.
잠시 있다가 금생琴生과 함께 간 곳이 바로 도산서당인데, 이곳은 정말 선생이 친히 지은 곳이어서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도 사람들이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못하였다. 때문에 낮은 담장과 그윽한 사립문, 작은 도랑과 네모난 연못이 소박한 유제遺制 그대로여서 마치 선생을 뵌 듯 우러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

처음에는 숙연하여 마치 담소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가 나중에는 그리워서 잡고 어루만지며 공경을 느끼게 된다.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유적과 덕행에 대해 아직도 보고 감동하여 흥기하는데, 하물며 당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집은 3칸인데, 동쪽은 헌軒이고 서쪽은 부엌이고 가운데는 실이다. 실은 완락재翫樂齋라 하고 헌은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여, 합하여 도산서당이라고 명명하였다.

여성 제주가 등장한 도산서원. 시대에 따라 변하는 법!



헌의 동쪽에 또 작은방 하나를 붙여 헌과 통하도록 해서 청廳을 만들고 나무를 쪼개 판板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의 와상臥床 모양 같았다.

금생이 말하기를, “선생 당시에는 이것이 없었는데 한강寒岡이 유의遺意를 받들어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못은 정우당淨友塘이라 하는데 작은 샘의 물을 끌어다가 대었다.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라 하는데 섶나무를 엮어서 만든 것으로 대개 평시의 제도를 본뜬 것이다.

뜰 왼쪽에서부터 산기슭에 이르기까지 소나무와 전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밑동이 모두 한 아름 정도 되었다. 물어보니, 선생이 손수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40년이나 되었는데 나무만은 여전히 무성하게 남아 있으니, 사람들이 아름다운 나무에 흙을 북돋아 주고 감당甘棠에 비의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실 안을 구경해 보니 서쪽과 북쪽 두 벽에 모두 장이 있는데, 각각 2층으로 된 장에는 모두 유물遺物이 보관되어 있었다.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는 기구器具 하나, 책상, 등잔대, 투호投壺 각각 하나, 화분대花盆臺, 타구唾具 각각 하나, 벼룻집 하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벼루는 어떤 자에게 도둑맞아서 지금은 없다고 한다. 무릇 벼루는 한 조각 돌덩어리일 뿐이나, 이곳에 있으면 값을 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 다만 다른 돌덩이와 같은 것일 뿐인데, 저 훔쳐간 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던가. 아, 유감스럽다.

또 청려장靑藜杖 한 자루는 갑匣을 만들어 간직해 놓았는데 조금의 파손도 없고 품질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1치마다 마디가 두서너 개 있어 학鶴의 무릎 같았고, 두드리면 쨍쨍 울리면서 맑은 소리가 나서 보배로 여길 만하였다.

동쪽으로 문을 내서 걷어 올리면 헌과 통할 수 있고, 남쪽으로 작은 창문을 내고 창 안쪽에 시렁을 가로놓아서 시렁 위에 베개와 자리 등의 물건을 두었다.

서원이라 해서 언제까지 도포자루만 휘날려야겠는가?



금생이 말하기를, “이 방은 선생의 수택手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누추하고 낡았지만 감히 개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벽면에 선생의 차기箚記와 필적이 정연하게 있었는데, 근래 원장院長 아무개가 유택遺宅을 수선하는 일로 방백에게 아뢰니, 방백도 감히 필요한 물자를 아끼지 않고 주었다. 종이를 많이 얻어 벽을 모두 새롭게 도배해 버려 이제는 한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사림이 회의하여 서원 문적에서 원장의 이름을 삭제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조롱하고 한탄하고 있다.

아, 선생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후세의 법칙이 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상서로운 구름과 해같이 사모하고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본다. 지금까지 거처와 용구가 아직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누군들 아끼고 진기한 보배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자질구레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마음에 새기고 삼가 기록한 것이다. 이는 옛것을 사모하는 벽癖일 뿐이니,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 바란다.

다시 홍의재에 이르러 마침내 금생과 함께 잤다. 노복이 다시 심원록尋院錄을 내와서 우리들이 성명과 자字, 향관鄕貫, 날짜를 줄지어 썼으니, 또한 전례이다.

이튿날 아침 출발하려 할 즈음 동쪽 기슭을 100보쯤 걸어 올라가서 천연대天淵臺에 이르니, 서쪽 기슭의 천운대天雲臺와 마주하여 우뚝 서 있었는데 물길이 도도하게 흘러 앞을 지나가고 시계視界가 탁 트여 원근을 막힘없이 전부 바라볼 수 있었다.

석石 위에 새긴 ‘천연대天淵臺’란 세 글자는 또한 월천이 유의에 따라 만든 것이다.

다시 천운대를 따라 내려와 저녁에 영천군榮川郡으로 가서 구학정龜鶴亭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서원 앞 시사단



[주-D001] 찬성공贊成公 :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1463~1502)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기지器之다. 장인 김한철金漢哲의 수많은 장서藏書를 물려받아 젊어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였다. 1501년(연산군7)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이듬해 병으로 졸하였다. 후에 아들 이황으로 인하여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증직되었고, 청계서원淸溪書院 계현사啓賢祠에 제향되었다.

[주-D002] 승지공(承旨公) : 이우李堣(1469~1517)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다. 149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을 거쳐 정언, 승지,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에 협력하여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봉해졌다. 청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 《송재집》이 전한다.

[주-D003] 관찰공觀察公 : 이해李瀣(1496~1550)다.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퇴계의 다섯째 형이다. 1528년(중종23) 문과에 급제하고 1541년 직제학,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는데 명종 때 이기李芑의 탄핵을 받아 갑산으로 유배 도중 병사하였다.

[주-D004] 이농암(李聾巖) : 이현보李賢輔(1467~1555)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1498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 때 안동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직되어 승지, 부제학,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으로 이황, 황준량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 《농암집》이 전한다.

[주-D005] 터가 …… 않다 : 본집 원문은 “宅曠而勢絶, 占地位不偏”으로 되어 있는데, 《퇴계집》 권3 〈도산잡영陶山雜詠〉 병기幷記 중에 “宅曠而勢絶, 占方位不偏”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퇴계집》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므로 그에 따라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주-D006] 본기本記 : 퇴계 이황이 지은 기문 〈도산잡영陶山雜詠〉을 말한다. 《퇴계집》 권3에 실려 있다.

[주-D007] 월천(月川) 조공(趙公) : 조목趙穆(1524~1606)이다. 본관은 횡성橫城, 호는 월천, 자는 사경士敬이다. 퇴계 팔고제八高弟 중 한 사람이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징소徵召하였으나 사양하고 일생 동안 퇴계 옆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심학心學에 밝았다. 저서로 《월천집月川集》이 전한다.

[주-D008] 한강寒岡 : 정구鄭逑(1543~1620)다.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한강, 자는 도가道可다. 성주星州 출신으로 김굉필金宏弼 외증손이다.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에게 모두 사사하였고, 학문이 뛰어나 남인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주-D009] 감당甘棠 :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감격하여 소공이 행차할 때 잠시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겼다는 고사가 《시경》 〈감당〉에 실려 있다.
[주-D010] 선기옥형璿璣玉衡 : 옛날에 천문天文을 관측하던 기구이다.

[주-D011] 투호投壺 : 병 속에 화살을 던져 넣은 다음 넣은 수효를 헤아려 승부를 가리던 놀이로, 여기서는 이 놀이에 쓰이는 도구를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10


***

서원 전경



성호가 도산서원을 찾은 때는 기축년 1709년, 숙종 35년이라, 《성호전집星湖全集》 제53권에 수록된 기記들은 이때 방문한 증언들이라, 그 대문을 여는 백운동서원 방문기〔訪白雲洞記〕에 의하면 백운동서원을 들른 때가 그해 10월 그믐이라 했고,

이어 11월 1일 순흥부에서 친구 신택경申澤卿을 접선해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기로 하고는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자고, 2일 봉화읍에 이르러 마침내 청량산 등반을 시작해 연대사蓮臺寺에서 자고는 그곳 만월대滿月臺 꼭대기를 등반하고는 술자리 펼치고는 부어라마셔라 하고는 다시 길을 최촉해 만암滿菴이란 데서 다시 퍼마시고 다시 이곳저곳 청량산 구경을 하시고는 하산하고는

다시금 퍼마시고 동행한 친구들을 전송하고는 다시 발길을 돌려 그날이 저물어서야 도산에 도착했다고 하니, 11월 4일쯤 도산에 도착한 듯하다.

계절로는 이미 겨울이었을 것인데, 왜 이 시점을 골랐는지 모르겠지만 이때 성호는 스물아홉 한창 나이였으니 철근이라도 씹어먹을 때 아니었던가 싶다.

이 도산서원 방문기를 나는 여러 각도에서 주목하는데, 첫째 어김없이 가이드가 등장한다. 청량산 여행에는 여러 친구가 동행했지만 실제 가이드는 연대사 중들이었다. 도산으로 가는 길은 신택경이 함께했으니, 이 친구가 가이드였다.

도산서원 이곳저곳은 그곳 사람들이 안내하며 이런저런 썰을 풀어댔다.

퇴계 사망을 기점으로 140년이 지난 때라고 했으니, 저 무렵 도산서원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 성호 증언을 통해 우리는 눈앞에 보는 듯하다. 저가 묘사한 도산서원 건물 배치와 현재의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나 역시 하도 도산서원을 찾은 일이 감감해서 기억할 수는 없다. 다만, 도산서당 뒤 서원이 배치하고, 기타 건물채 모습들은 거의 일치하는 듯하다.

서당과 서원을 함께 일컬어 도산서원으로 합칭함을 본다. 하긴 실제 가서 보면 두 구역은 한 구역 안에서 별도공간일 뿐 구별될 수 없다.




서원을 구성하는 각 건물채 기능은 성호 증언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니, 저런 기능별 분류가 비단 도산서원만의 유별은 아니다.

또 하나 우리가 눈 뜨고 봐야 할 대목은 박물관의 원초적 기능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퇴계 흔적이 남은 것들은 그 유품은 물론이고, 그의 손때조차 함부로 건딜지 아니하려는 모습을 간취한다.

심지어 퇴계가 비름빡에 쓴 낙서조차 보존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니,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그 글씨들을 보수하느라 가려버린 아무개 원장은 심지어 그 일로 탄핵되어 원적에서도 삭제되기도 했음을 본다.

문화재 보수를 잘못하는 바람에 신세 조진 것이다.

그 컬렉션 목록은 성호가 채록했으니, 개중에서도 벼루는 도둑맞았음을 본다. 담당 학예연구사는 작살났을 것이다. 뭐 그가 훔쳤는지 또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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