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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AllaboutEgypt] 성가족의 이집트 방문(3) 부바스티스와 삼각주 지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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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환

출처: https://slideplayer.com/slide/16519599/




앞선 회차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성가족의 이집트 피난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23대 대주교 교황 테오필로스(Theophilus: 384-412년)입니다.

그의 회고록과 이를 바탕으로 작성된 『콥트 정교회 성인열전』(Coptic Synaxarium)에 따르면 성가족이 이집트에서 첫 번째로 방문한 도시는 오늘날의 카이로(Cairo)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텔 부바스타(Tell Bubasta)입니다.

이 도시는 이름이 고양이 여신 바스테트(Bastet)를 주신으로 섬긴 고대 이집트 도시 부바스티스(Bubastis)에서 유래합니다.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전 484-425년)는 자신의 저서 『역사』(Histories)에서 부바스티스 신전이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II, 137):

“아이귑토스의 다른 도시들도 [제방이 건설됨에 따라] 높아졌지만, 내 생각에 가장 높이 돋우어진 것은 부바스티스 시인 것 같다. 이 도시에서는 부바스티스 신전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더 크고 비용이 많이 든 신전들도 있지만 이 신전만큼 아름다운 신전은 없다. 부바스티스의 헬라스 이름은 아르테미스다.”

이어 헤로도토스는 부바스티스 신전 규모와 내부 구조 등을 서술한 후 이곳에 바스테트 여신상을 비롯한 다양한 "형상"이 신전에 안치되어 있다고 썼습니다.

텔 부바스타에서 아기 예수는 사막에서의 여정에서 그랬듯이 땅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했는데,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의 존재만으로 이 도시의 모든 우상들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콥트정교회에서는 이처럼 고대 종교에서 숭배된 신상들이 아기 예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구약성서』 「이사야」에서 예언된 이집트의 운명(19:1), 즉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이집트로 가실 것이니, 이집트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간담이 녹을 것이다”가 실현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요컨대, 이집트는 성가족의 피난처로 선택되고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함으로써 이집트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지상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는 민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이를 통해 「이사야」의 다른 예언(19:25), 즉 “나의 백성 이집트야, ... ... 복을 받아라” 역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가족의 피신과 귀환을 통해 「이사야」에 기록된 또 다른 예언, 즉 이집트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거룩한 땅이 될 것이라는 예언도 마침내 이루어집니다(19:19-20):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가 세워지겠고, 이집트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 이 제단과 이 돌기둥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 계시다는 징표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곳 백성이 압박을 받을 때에, 주님께 부르짖어서 살려 주실 것을 간구하면, 주님께서 한 구원자를 보내시고, 억압하는 자들과 싸우게 하셔서,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콥트 정교회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의 이 예언에서 “제단”은 이집트의 정중앙, 다시 말해 중부 이집트 쿠사이(Cusae)에 위치한 알-무하라끄 수도원(al-Muharraq Monastery)의 동정녀 마리아 교회(Church of Virgin Mary)의 제단을 지칭합니다.
제단은 성가족이 이 지역에 6개월 간 머무를 때 아기 예수가 누운 바로 그 돌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콥트 정교회는 또한 성 마르코(St. Mark)가 기원후 69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몸소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교회 대교주좌(Patriarchal See of the Apostolic Church)가 바로 이집트 국경지대에 세워진 “돌기둥”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어 예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이사야」 19:21):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님께 예배하고, 또 주님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콥트 정교회는 이것을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실제로 기원후 42년경부터 성 마르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기독교가 이집트 전역으로 전파되고 수많은 교회가 건립됩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콥트 정교회 전승에서는 이들 대부분이 성가족이 유랑하면서 체류한 곳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후 테오필로스의 회고록이나 『콥트 정교회 성인열전』의 전승뿐만 아니라 콥트 정교회의 신학자, 성서 주석학자, 교회사가, 그리고 신자들이 앞다투어 성가족의 이집트 체류와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를 남깁니다.

그 결과 기원후 13세기경에는 성가족이 머무른 “13곳 체류지” 체계가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세기에 걸쳐 세부사항이 꾸준히 추가되면서 체류지 수는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참고로, 이집트 관광청(Ministry of Tourism)은 2017년부터 시작된 체류지 정비 및 개발 사업을 통해 공식 순례지 25개소를 지정했으며 로마가톨릭교회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전세계 순례자들을 유치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관련기사: Holy Family's Flight into Egypt to boost tourism: MP

다시 텔 부바스타로 돌아가서, 아기 예수로 인해 신상들이 무너지자 지역 주민들은 성가족을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다시 여정에 올라야 했습니다.

삼각주 북부로 향한 이들은 나일강의 다미에타(Damietta) 지류 서쪽 세베뉘토스(Sebennytos) – 그리스 지배기 초기에 고대 이집트의 역사서 『아이귑티아카』(Aegyptiaca)를 저술한 신관 마네토(Manetho: 기원전 3세기)의 고향으로 현대의 지명은 사만누드(Samannud)입니다 – 를 지나 사카(Sakha)라는 삼각주의 한 도시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테오필로스 회고록에 따르면 아기 예수는 이곳에서 바위 위에 발자국을 남겼는데 이후 파괴와 도난을 우려한 콥트교도들이 이 성스러운 바위를 땅에 묻어 숨기는 바람에 바위는 수세기에 걸쳐 행방이 묘연했다가 19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현지 콥트교회 부근에서 다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사카를 떠난 성가족은 와디 엘-나트룬(Wadi el-Natroun)을 지나게 됩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sḫt ḥmAt “소금벌판”(Field of Salt)으로 불렸으며 제 1 중간기(기원전 2160-2055년) 혹은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1650년) 초기의 서사문학 작품 『언변 좋은 농부』(Eloquent Peasant)의 주인공 쿤아눕(Khun-Anup)의 고향입니다).

훗날(4~7세기) 수백 개 콥트 정교회 수도원 세워지면서 이곳에 모여든 수백 수도승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막에서의 고행을 기꺼이 감내할 것을 예견한 아기 예수는 로제타(Rosetta) 지류를 건너 여기를 지날 때 이 소금벌판을 축성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제 성가족은 사막을 지나 오늘날의 카이로 지역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회차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설명: 아기 예수의 발자국이 찍힌 것으로 여겨지는 사카(Sakha)의 바위. 이 사건 이후 지역은 콥트어로 "예수의 발(자국)"을 의미하는 "페카-이수스"(Pekha-Issous) 혹은 현지 발음으로 "비카-이수스"(Bikha-Isus)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콥트정교회 #외경 #유아기복음서 #테오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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