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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보湺, 수원水源 확보를 위한 인간의 쟁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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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 김천엘 갔더니 온동네를 파헤쳐 놔서 듣자니 수도를 건설한댄다. 아마 인근 부함댐이나 어디에서 끌어오는 모양인가 싶었지만 더는 알아보지 않았다.

암튼 우리 동네도 단군조선 이래 첨으로 상수도가 2019년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종래엔 우리 동네는 물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나도 하도 고향 떠난지 오래되어 놔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니와 두 가지 시스템이 있었으니 먹을물과 빨랫물 공급 시스템이 그것이라 이 두 가지는 수원水源이 달랐다.(농수 공급은 또 다르다.)  

당연히 전자는 요새 수질 개념으로는 1급수여야 했으니 깊은 계곡에서 끌어온 반면, 동네 어귀를 타고 흐르는 빨랫물은 동네 앞을 흐르는 강에서 끌어왔다.  

 

 



저 두 시스템에서 관건은 낙차였으니 고도가 문제였다.

자연상태에서 물은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기 마련이라, 좆도 모르는 놈들이 강물은 흘러야 한다느니, 그런 상태가 좋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해대지만, 그런 시스템으로는 살 수가 없다!

제발 암것도 모르면서 헛소리 좀 하지 마라. 

강물은 흘러야 하지만, 흐르는 강물은 암짝에도 쓸모가 없어, 그걸 일단 가두어야 하고, 그 가둔 데서 한쪽 공간을 터주어 물길을 내야 그 물길이 동네까지 들어온다.

이게 없으면 일일이 강물을 오가며 물을 져다 날라야 한다. 그게 싫으면 냇가에다가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데 너가 그리 지어 살아봐라. 홍수나면 뒤진다. 

먼저 먹는물 확보라는 측면에서 《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 출현하는 사람들이 거개 이 방식을 사용하던데, 내가 지금 사는 곳보다 고도가 높은 데 위치한 샘이나 계곡 물에서 수도관을 설치해 끌어오는 방법이 있으니, 이렇게 끌어온 물은 동네 뒤 높은 지점, 주로 대나무 밭 한가운데였는데, 이쪽에다 물탱크를 설치해 각 가정으로 끌어오는 방식을 썼다. 

예서 관건은 수도관. 이 관은 안정성과 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땅속 깊이 묻을 수밖에 없다.

우리 동네에서는 산허리를 따라 땅을 깊이 파서 이 기나긴 수도관을 묻었으니, 누가 파고 누가 묻었는가? 동네 사람들이 그리했다. 나도 어릴 적에 이런 보수공사에 동원되곤 했다. 

다음으로 동네사람들이 공동 사용하는 노출형 빨랫물 공급 문제는 어찌 해결했는가? 동네보다 당연히 높은 지점에다가 강물을 막아 그것을 끌어왔는데, 그 물길이 아주 길다. 낙차를 확보하자면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강물은 어찌 막는가?

바로 이에서 등장하는 것이 보洑다.

이명박 정부에 의한 사대강사업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는데, 난 다르게 본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찬송가를 보내자는 뜻은 아니어니와, 그 담대한 발상을 나는 높이높이 친다. 

 

 

한데 이 보란 것이 말이다. 툭하면 터져서 암짝에도 소용이 없다.

종래에는 이 보는 가지가 그대로 달린 나무를 베어다가 강물을 가로질러 놓고는 그 아래위로 큰 돌덩이를 잔뜩 눌러제끼는 그런 원시적인 방법이었으니, 한데 문제는 이런 원시적인 보는 조금만 물길이 불어나도 그냥 쓸려가 버린다. 그래서 거의 매년 보를 새로 설치해야 한다. 

한데 태풍 매미 같은 물난리를 보면, 보는 흔적도 없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물길이 바뀌거나, 혹은 너무 깊이 파여 암반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했으니, 지금 우리 동네 앞 시내를 보면 앙상하게 암반이 노출되어 있음을 본다.

이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이런 일이 없었다. 토사가 제법 쌓인 상태였는데 지금은 암반이 앙상하게 노출됐으니, 다만 더는 더 파내려갈 공간은 없게 생겼다는 그런 점이 안심이랄까?

이렇게 강물이 낮아지면 문제가 생긴다. 새로운 보를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다. 

 

 

이런 고민들을 쏵 해결해준 신공법이 등장했으니, 바로 철근콘크리트다. 이 철근콘크리트로 보를 설치해 놓으니 비로소 보가 안전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물론 이 철근콘크리트도 매미 때 보니 안전하지 못해 것도 휩쓸려 내려가더라만, 덧붙여 물고기가 더는 거슬러 올라가는 데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거니와, 물고기를 위해 동네를 희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고학? 암것도 아닌 걸 고고한 척 포장하는 데는 선수인 학문이다.

고고학이 구명하려는 요체는 지들끼린 어케 정의하는지 나는 모르나 내가 생각하는 건 실로 간단해서 인간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이 어찌 살았는가? 그 공동체는 어떠했으며 어떤 시스템으로 움직였는가?

이게 좆도 무에 어렵다고 되먹지도 않은 도표 그리고 암호화해서 지랄 발광이란 말인가?

고고학 발굴성과를 보면 동네는 반드시 산어귀에 자릴 잡는데 물을 피하고자 하는 지혜라 할 만 하나 그건 물과 멀어지는 결정적 하자가 있다

이 하자를 극복해 가는 과정, 이걸 구명해야 한다.

이 점을 심대히 고려하는 글을 나는 만난 적 없다. 안동 저전리를 필두로 보 몇 군데 발견되니 그런 것들로 학술대회란 걸 하는 걸 한두번 보긴 했다만, 내가 궁구하고자 하는 그런 의문은 전연 없었다. 

무슨 씨잘데기 없는 토기 그림만 그리고 주거지 배치 양상만 잔뜩 그린단 말인가?

이명박 정부 때 보 논쟁이 얼마나 시끄러웠는가? 

이후 그 보들로 지금 또 얼마나 시끄러운가? 

어째 한국고고학에서는 지금과 연동하는 이런 보 문제를 고민하고 천착하는 글 한 편 보지 못하는가? 고작 농경사 혹은 농업사 전공하는 자들 글 같지도 않은 글 몇 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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