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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파라오 람세스2세가 자기 신민臣民을 갈굴 때 by 유성환

by taeshik.kim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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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74년 5월 12일 발발한 카데쉬 전투(Battle of Kadesh)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분께서 주지하시는 것처럼, 이 전투는 서아시아 최강국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카데쉬라는 도시를 두고 격돌한 인류 역사 상 최초의 대규모 전면전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이집트 군을 지휘한 람세스2세(Ramesses II: 기원전 1279-1213년)가 히타이트 총사령관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 기원전 1295-1272년)의 기만전술에 넘어가 주력부대로부터 고립되면서 상당히 고군분투했다는 것 역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전략적 오판 때문에 적병들에게 살해당할 – 혹은 그보다 더 일이 꼬여 포로로 사로잡힐 – 뻔한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한 람세스2세가 카데쉬 전투를 치르고 난 다음 자신의 부하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토에서 조신들의 끊임 없는 찬사와 주목을 받는 왕 노릇만 하던 람세스2세는 자신의 실수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을 버리고 전장을 이탈했다가 나중에 본진으로 돌아온 – 그리하여 천하의 이집트 군이 실제로는 종이호랑이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한 – 장교들과 사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진 설명: (람세스 2세) "니네들 이제 다 뒈졌어!"



이집트어 원문이 다소 길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카데쉬 전투 무훈시』, KRI II, 78-82 = K1 + L1 + L2, §§251-269

폐하께서 그의 병사, 그의 지휘관, / 그의 전차병에게 이르시기를, / “짐의 지휘관들, 병사들, 짐의 전차병들아, / 싸울 줄 모르는 그대들은 대체 무엇이냐? / 사람이 주의 면전에서 용감하게 행한 후 귀환했을 때, / 자기 성읍에서 높임 받지 않았던 경우가 있더냐? / 싸움으로 얻은 명성은 좋고 또 좋으니, / 자고로 사람은 그의 강건한 팔로 인해 높임을 받느니라. / 짐이 너희 중 하나라도 좋지 않게 대한 적이 있느냐, / (그럼에도) 너희는 짐을 적들 한 가운데 홀로 남겨두지 않았느냐? / 너희는 아무튼 살아 있는 것이 다행 아니냐, / 짐이 홀로 있을 때(조차) 숨을 들이쉰 너희들이니 말이다! / 짐이 너희에게 무쇠와 같은 성채임을 / 너희의 심장은 알지 못하느냐? /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하겠느냐? / 너희가 나를 아무도 없이 홀로 남겨두었다는 것을, / 그 어떤 지휘관도 전차병도 군인도 / 짐이 홀로 싸울 때 거들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에도) 짐은 홀로 / 백만의 이방을 제압했느니라. / 짐의 탁월한 군마 / “테베의 강자”와 “무트 여신께서 만족하시다”를 타고서, / 짐이 홀로 수많은 이방과 맞서 싸울 때, / 그들만이 짐의 손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노라.



여기서 보신 것처럼 람세스2세는 자기가 진정 위기에 빠졌을 때에는 자신의 애마들만이 자신과 함께했다고 지적하면서, (말보다도 못한) 군 지휘관과 엘리트 전차병, 그리고 병사들을 “짐이 홀로 있을 때(조차) 숨을 들이쉰 너희들”이라고 꾸짖습니다.

역시 神-王 파라오는 갈구는 수준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냐”라는 표현이 있다면 고대 이집트에는 “그러고도 숨이 쉬어지더냐”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텍스트에 그리 자주 나오는 표현은 아닌 걸 봐서 람세스 2세가 스스로 생각해낸 찰진 표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이와 유사한 도상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아무튼 람세스 2세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 호감과 매력은 반감되지만 –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무시로 찾아오는 각종 데드라인은 마침내 삶의 데드라인이 찾아올 그날까지 계속되겠지만 다사다난한 4월과 5월을 지나면서 다행히도 일정이 조금은 헐거워졌습니다.

여름에는 그간 손대지 못한 원고들에 집중할 예정인데 그 중 하나가 람세스 2세 일대기입니다.

열심히 작업해서 곧 여러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보여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5월아 빨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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