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저는 《서양고대사연구》 제48집에 ‘<벤트라시 석비> – 위작 역사기술 및 신화학적 분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저는 《카이로 사발》(Cairo Bowl: CG 25375)이라는 텍스트를 인용했습니다.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데디Dedi가 이우나크트Iunakht의 소생이자 신관인 인테프Intef에게 보냄 : 병이 난 이 여종 이미우Imiu와 관련하여, 당신은 왜 그녀를 해코지하는 모든 남자(영혼)와 모든 여자(영혼)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습니까? 왜 당신의 대문이 황량하기를 바랍니까? 오늘 그녀를 위해 새롭게 싸우시오. 그리하면 그녀의 집이 다시 일어날 것이며 당신에게는 물이 따라질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집은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그 여종이 당신의 집(의 살림)을 꾸려 나간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녀를 위해 싸우시오. 그녀를 지켜보시오. 그녀를 해코지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녀를 구하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집과 당신의 아이들이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잘 들으셨기를.”
고대 이집트인들은 집에 아픈 사람이 생기거나 구성원 사이에 분란이 발생했을 때 이러한 사건이 적대적인 영혼의 소행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 대응책 중 하나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영혼 – 대개는 사망한지 얼마 되지 않은 가족 구성원에게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카이로 사발》 텍스트는 망자에게 보내는 그런 편지 중 하나인데 중왕국시대 제12왕조(기원전 1991~1783년) 초기에 제작된 붉은 사발 안쪽과 바깥쪽에 신관문자 형태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데디라는 여인은 먼저 사망한 남편인 인테프에게 병든 여종을 괴롭히는 나쁜 영혼들과 싸워달라 요청합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이처럼 “망자에게 보내는 서신” 장르에 속하는 텍스트들이 존재하는데 최근 이런 텍스트들을 모아 분석한 《망자에게 보내는 고대 이집트의 서신: 산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나는 망자들의 영역》(Ancient Egyptian Letters to the Dead: The Realm of the Dead through the Voice of the Living)이라는 제법 긴 제목을 가진 반가운 저서가 출간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학술서적으로 다시 편집해 만든 이 책에는 《카이로 사발》텍스트(258-269쪽)를 비롯하여 모두 16개 서신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텍스트가 문헌학·문화사·종교학·구술성orality·상호전거성intertextuality 등과 같은 다양한 시각을 통해 분석되는 구성 또한 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
문제는 가격.
제 단골인 아마존에서 177달러(23만원)를 주고 샀습니다. 원래 이렇게 비싼 책은 그간 부운 적금이 만기되면 사는데 이번에는 어느 메디치 家의 너그러운 후원 덕분에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지금까지 “귀족의 학문”인 이집트학에서 고군분투하는 평민 학자의 넋두리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Editor's Note ***
유 박사가 소개한 저 편지는 결국 주문呪文인데, 그 형식도 그렇고 그 얼개도 동아시아 도교에서 구사하는 관련 의식과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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