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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팔만대장경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찍은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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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문집인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集》은 현존하는 그 체제 골격이 다름 아닌 이규보 본인 뜻에 따랐으며, 나아가 그의 생전에 출판을 목전에 두었다는 점을 우선 주목할 만하다. 

그 문집 앞에 붙은 그의 연보年譜에는 그의 아들 이함李涵이 쓴 서문이 있으니, 이로 보아 이 연보 또한 그의 생전, 혹은 늦어도 이규보 죽음 직후에는 이미 정리됐음을 본다. 이는 저 문집이 철저히 이미 이규보 당대에 후세를 위해 준비된 출판기획이라는 뜻이다. 



동국이상국집 序




"함涵이 옛사람 문집과 연보를 보니 모두 연보 중에 그 저술한 본말과 이유를 소상히 적어 서로 참고가 되도록 하였으나 대개 옛사람 시집詩集이 꼭 저술한 연월을 표시하지는 않은다. (그럼에도 연원을 표시한 경우는) 무엇에 의거하여 소상하게 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가공家公(아버지 이규보) 문집에는 연월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연대를 하나하나 다 기록할 수 없고 다만 10분의 1 정도쯤 적어 놓을 뿐이다." 


이규보가 남긴 시문을 보니, 그 글을 언제 썼는지 밝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이규보는 신축년, 1241년, 고려 고종 28년

 
"9월 초이튿날 갑자기 늘 누었던 자리를 떠나 바로 서쪽을 향해 누워 오른쪽 갈빗대를 자리에 붙이고 밤이 되자 잠든 듯이 졸하였다. [越九月初二日。忽離常寢。向西而臥。以右脅著於席。至夜翛然而化。]"
 

고 한다. 이것이 아마 예기禮記에서 적은 죽어야 하는 그 모습일 터인데, 오른쪽 갈빗대를 자리에 붙인 모습이 나로서는 선뜻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저리 적었다 해서 이규보가 저런 모습으로 진짜로 죽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죽어가는 마당에 죽어가는 사람이 무슨 경황이 있다고 서쪽을 향해 눕고, 오른쪽 갈비뼈는 무슨 기운이 있다고 저리 놓고 죽었겠는가? 그냥 인사불성 상태로 아무 상태로 엎어져 있다가 죽었는데 저리 죽었다고 할 뿐이다. 

그가 죽을 당시 그의 집은 강화였다. 몽골 항쟁기라 그 역시 조정을 따라 강화로 이주했던 것이다.

9월 2일에 죽은 그의 유해는 12월 6일 경인庚寅에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했으니, 대략 90일간 그의 시신은 어딘가에 있었던 셈이다. 이른바 빈殯인데, 그의 시신은 어디다 놓아뒀던지 모르겠다. 그가 독실한 불교신도였고, 당시 불교식 화장이 유행하던 때가 아닌가 하는데, 그렇다면 화장하고 인골을 어딘가에 안치했다가 매장했다는 뜻일까? 

또 옆길로 샜다. 

그의 문집 이야기로 돌아가 죽기 두 달 전인 7월, 그의 병이 깊어지고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연보에 의하면, 

 
"진양공晉陽公이 듣고 이름난 의원들을 보내 문병과 치료를 끊임없이 하였다. 또 공이 평소에 저술한 전후문집前後文集 53권을 모두 가져다가 공인工人을 모집하여 빨리 새기라고 독촉까지 한 것은 공이 죽기 전에 한번 보이고 마음을 위안시키려 했던 것이다." 
 

예서 말하는 진양공이란 당시 최씨 무신 막부 최고 실권자인 최우崔瑀를 말함이라, 그는 이전에는 진양후晉陽侯였다가 1242년 작爵이 올라 진양공晉陽公이 되었으므로, 저 기술은 문제가 있다. 저때 최우는 진양후였지 진양공이 아니다. 저 연보 기술을 이규보 아들이 쓴 시점에 최우는 진양공인 까닭에 저리 쓴 것이다. 

저 증언은 이규보가 죽음에 이른 그 시점에 최우가 그의 문집을 생전에 서둘러 간행하려 했음을 증언한다. 최우가 이규보를 어찌 생각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으니, 무엇보다 문집이 방대한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이규보 사망 당시 문집 발행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까? 

놀랍게도 저 문집은 서문이 이규보 생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이규보가 몸져 누운 시점은 7월, 죽은 시점은 9월 2일.

나중에 발간된 그의 문집 서문은 입내시入內侍 조산대부朝散大夫 상서尙書 예부시랑禮部侍郞 직보문각直寶文閣 태자문학太子文學 이수李需가 썼다.

한데 이수가 서문을 쓴 시점은 신축년, 1241년, 고종 28년 8월이다. 

이수는 문집이 발행될 줄로 알고 이미 써 놓았던 것이다. 그 서문에서 이수는 이리 말한다. 

 
공은 평생에 저술한 글을 쌓아 두지 않았기에 아들인 감찰어사監察御史 함涵이 만분의 일쯤 주워 모았었다. 고부古賦·고율시古律詩·전표箋表·비명碑銘·잡문雜文 따위 몇 편을 한데 합쳐서 문집을 만들도록 간청한 결과, 공이 그 간청을 옳게 여기고 이리저리 갈라 41권으로 만들어 이름을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이라 하였다.

함涵이 또 (아버지인) 공에게 간청하기를, 

“문집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공은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본래 재주가 모자라고 또 공의 아들과 같은 또래로서 첫머리에 쓰는 서문을 감히 지을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공의 명이 더욱 신근하기에 이 몇 마디 말로 서문을 적는다.

 
이로 보아 이규보 문집은 이규보가 생전에 짠 얼개를 따랐으며, 그 발행은 최우의 지시였으며, 그 지시를 따라 그의 생전에 의욕적으로 추진되고, 그 서문까지 받아놓았지만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음을 본다. 

그렇다면 그의 문집은 언제 나왔는가? 나왔다 함은 간행을 의미한다. 금속활자나 목판으로 찍어낸 판본을 말한다.



동국이상국집 발미



이 문집  끝에는 발미跋尾가 있다. 이 후기를 봐야 한다. 이 후기는 아래에서 보듯이 이규보 손자이며, 연보 서문을 쓴 이함李涵의 아들 이익배李益培(?~1292)가 썼다. 

 
사손嗣孫 익배益培는 말한다.

할아버지 문순공文順公(이규보)의 전집全集 41권, 후집後集 12권, 연보年譜 1축軸이 세상에 행해진 지 이미 오랜데, 오착되고 탈루된 곳이 많다. 이제 분사도감分司都監이 《대장경大藏經》 판각을 마치고 나서, 칙명을 받들어 이 문집을 판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다행히 그 이웃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본家藏本 한 질로 그를 교수校讐하였다.


이 말은 좀 애매한 점이 있다. 무엇보다 분사도감에서 판각할 때까지 유통된 동국이상국집이 어떤 형태였는지가 불분명하다.

다만, 저 문집은 미완성인 채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다가 저때 와서야 비로소 목판에 새겨 인쇄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 필사본은 여러 부가 존재했던 듯, 개중에서도 이익배는 자기 집에 보관한 그 필사본을 들이밀어 비로소 판각에 부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문집은 언제 어디에서 판각했을까? 이어지는 이익배 증언이다.


신해년에 고려국高麗國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칙명을 받들어 판각하였다.

교감校勘 : 하동군감무관구학사 장사랑 양온령(河東郡監務管句學事將仕郞良醞令) 이익배李益培
녹사錄事 : 장사랑 군기주부 동정(將仕郞軍器注簿同正) 장세후張世候
녹사錄事 : 장사랑 군기주부 동정 홍식洪湜
부사副使 : 진주목부사 병마금할시 상서공부시랑(晉州牧副使兵馬軡轄試尙書工部侍郞) 전광재全光宰
 
 
판각 시점은 신해년이다. 판각 기관은 분사대장도감, 판각 장소는 진주목이다.

신해년은 1251년, 고종 38년이라, 이 시점이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16년 만에 완공된 때다.

고려 왕조는 대장경을 찍을 무렵에 동국이상국집도 동시에, 그것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이 판각한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찍어낸 일을 대서특필하나 그때 동국이상국집도 같이 찍었다는 사실 역시 대서해서 특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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