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사람에 따라 대한제국 최후의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대한 유서類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정말 다행스럽게도 국역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나와 지금 서비스 중이다.
뒤적뒤적거리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특히나 원문을 살짝살짝 떼내어 짜깁기하는 그 솜씨가 예술이라 까딱 잘못하면 무슨 말인지 헷갈릴 뻔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인용한 이 부분을 보자.
정광正匡 최승로의 상소에 이르기를,
"서인庶人 백성이 문채文彩를 입지 못하는 것은 귀천貴賤을 구별하고 존비尊卑를 분변하기 위한 까닭입니다. 문채 있는 물건은 모두 토산土産이 아니니, 사람마다 입는다면 사치스럽고 참람됨이 절도節度가 없게 되고 재물을 소모하는 한탄이 있을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당堂이 9척尺이고 제후諸侯는 당이 7척이라'고 하여 스스로 정한 제도가 있는데, 근래에는 재력財力이 있으면 다투어 큰 집을 지어 제도를 넘으니, 한 집의 재력을 고갈시킬 뿐만이 아니라 진실로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게 됩니다. 아울러 엄격히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라 하였다.
正匡崔承老䟽曰 庶人百姓不得服文彩 所以別貴賤 辨尊卑也 文彩之物 皆非土産 而人人服之 則奢僭無度而有耗財之歎 禮云 天子堂九尺 諸侯堂七尺 自有定制 近來苟有財力 則競搆大屋 踰越制度 非但盡一家之力 實爲貽百姓之弊 並嚴行禁止焉
뭐 그냥 봐서는 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의 원문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 신라 때에 공경公卿·백료百僚·서인庶人의 의복·신발·버선에는 각기 품색品色이 있었습니다. 공경과 백료는 조회 시에는 공란公襴을 입고 천집穿執을 갖추었으나, 조회에서 물러나오면 편복便服을 입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무늬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는데, 귀천을 나누고 존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一) 新羅之時, 公卿百僚庶人, 衣服鞋襪, 各有品色. 公卿百僚, 朝會, 則著公襴具穿執, 退朝, 則逐便服之. 庶人百姓不得服文彩, 所以別貴賤, 辨尊卑也. ...
...
1.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집은 9척이고, 제후諸侯의 집은 7척이다.’라고 하였으니, 나름대로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이 존비尊卑와 상관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 짓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군·현 및 정亭·역驛·진津·도渡의 세력가[豪右]들이 경쟁하듯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하게 되니, 이는 다만 한 가문의 힘을 다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一) 禮云, ‘天子堂九尺, 諸侯堂七尺.’ 自有定制. 近來人無尊卑, 苟有財力, 則皆以營室爲先. 由是, 諸州郡縣及亭·驛·津·渡豪右, 競構大屋, 踰越制度, 非但盡一家之力, 實勞百姓, 其弊甚多. ...
서로 다른 조항을 갖다가 한데 버무려 하나의 글로 만들어냈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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