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겨울, 서울 인사동 통문관에서 작은 전시가 하나 열렸다.
<명사, 정객, 시인, 문인 자필서명증정본 전시> - 말 그대로 당대 명인들이 누구 주려고 사인한 책 265권을 모아 보여주는 전시였다.
통문관쯤 되니까 가능한 전시였겠다.
도록 말고 얇은 카탈로그를 만들었는데, 세상에나 통문관주인 산기 이겸로(1909-2006) 선생이 직접 철필로 일일이 베껴 롤러를 민 등사본이었다.
인사동 어느 헌책 좌판에 널부러져있기에 율곡 선생 한 분과 바꾸어왔다.
그리고 제주에서 펼쳐본다.
옛 판식에 써서 조선시대 필사본 느낌마저 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득 황홀해지기까지 한다.
위창 오세창(1864-1953)에게 백범 김구(1876-1949)가 드린 <백범일지>,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서 상허 이태준(1904-?)에게 증정한 <조선문자급어학사> 같은 이름들을 보자니...
지금도 이 책들이 통문관에 남아있을까?
아니면 천지사방 새 주인 찾아 흩어졌을까?
궁금해질 지경이다.
팔랑팔랑 넘겨보다가 눈에 띄는 이름을 발견했다.
244번, 중국 민국시대의 풍운아 중 하나인 군벌 풍옥상(1882-1948)이 약산 김원봉(1898-1958)에게 서명 증정한 <나의 생활>이란 책이다.
80년대, 아마도 김원봉 유품으로는 유일하게 남한에 남아있던 게 아니었을까.
이뿐만 아니라 이 카탈로그에는 월북 또는 납북되어 언급마저도 금기시되던 여러 인물이 주고받은 책이 적지 않다.
88년 '해금'까지는 5년이나 남은 군사정권 시절이었음에도 이런 책을 전시하고 카탈로그에도 실을 수 있었다니,
산기 선생 그의 배포는 얼마나 컸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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