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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폭발하는 일본발 대장경 수요, 하마터면 몽땅 내줄 뻔한 팔만대장경판

by taeshik.kim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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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실록을 보면 일본에서 대장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친다.

인쇄판 전질을 달라는가 하면 아예 경판을 달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

한데 이를 훑어보면 묘한 흐름들을 감지한다.


해인사 소장 팔만대장경판. 하마터면 조선 전기에 이를 몽땅 일본에 선물로 보낼 뻔 했다. 줘버려야 한다는 요청이 빛발쳤다. 하지만 세종은 노련했다. 우리가 지금 줘 버리면 저놈들이 다시는 와서 달라 굽신거릴 일 없다 해서 안 줬다.



첫째, 이런 요구가 일본 조정 차원뿐만 아니라 권력자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 단위 역시 많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옆집에서 얻었다니 나도 얻자는 심산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대장경 수집 열풍이 있었다.

둘째, 전질 혹은 경판을 얻고자 일본에서 바리바리 선물을 싸오는가 하면 조정에서도 뻔질나게 사신을 파견했다는 점이다. 이는 결코 조선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외교 경제 실익이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이를 조선에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측면은 경판을 주어버리면 일본애들이 더 이상 우리한테 굽신거리지 않게 된다는 조선 조정의 판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세종이 팔만대장경판을 주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넷째, 이런 뻔질난 요청은 불교의 악영향을 알고 있던 이른바 조선의 성리학적 지식인 그룹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빗발치는 대장경 수요를 정치 외교 경제에 이용하는 정부 정책에 이들 지식인은 반기를 들고 노골적인 불교 탄압책을 주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저런 요망한 불설 경판은 차라리 일본에 줘 버리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 조선 내부에서 빗발쳤다.

다섯째, 수요 충당을 위해 조정은 인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조선 전기에 유례없는 인쇄술 발달을 불러온 획기 중 하나가 대장경 인쇄였다. (201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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