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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내성사신內省私臣을 폭로하다] (2) 중국보다 신라가 먼저 만든 내성內省, 자가당착하는 신라 관부官府

by taeshik.kim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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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본 대로 본기에 두 번 등장하는 내성內省을 삼국사기에서는 직관職官 중 첫 머리에서 소개하는데, 예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이 직관지 기술은 오직 그 조직만을 소개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내성이 어떤 역할을 하던 조직인가일 테지만 이에 대해서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는 직관지가 다루는 다른 정부조직 역시 마찬가지라, 이것이 삼국사기 직관지가 지닌 결정적인 하자다. 

따라서 본기 기술도 그렇고, 직관지 기술만으로는 우리는 정작 내성이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전연 알 수가 없다. 그 어디에서도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 기관인지를 설명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주 자랑스럽게 정문연본 삼국사기 역주본은 저 직관지 내성 첫 대목에다가 아주 보란 듯이 아래와 같이 내성을 설명한다. 

궁정宮廷 업무를 통괄하고 근시집단을 통솔하는 관청. 후대의 궁내부宮內府에 상당한다.

이것이 우리가 의문을 품은 그 핵심이다. 곧 삼국사기 어디에서도 알 수 없는 내성이 실로 담대하게도 이런 구실을 했다고 한다. 누가? 김부식이? 일연이?

아니다. 현대 역사가들이 한 소리다. 이는 곧 이 소리가 개소리가 될 여지를 여는 창구다. 

아무튼 그러면서 저 역주본은 상술하기를 

이 내성은 2차의 정비과정을 거쳐 성립되었다. 1차는 진평왕眞平王 7년(585)에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에 각각 사신을 설치한 것이고, 2차는 진평왕 44년(622)에 3궁三宮 전체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성을 설치하고 그 장관으로 사신을 둔 것이다. 최초의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이찬伊湌 용수龍樹가 임명되었다. 진평왕이 왕실관계의 업무를 통일하여 독립된 관서에서 처리하게 한 것은 왕실의 전제력을 강화한 것을 보여준다. 내성이란 명칭은 수隋의 전내성제殿內省制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이인철, 《신라정치제도사연구》, 1993, 56~57쪽)도 있다. 신라 진평왕대의 내성 설치에 대해서는 이정숙의 논문(이정숙, 《新羅 眞平王代의 王權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이 참조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12쪽).
 

경주 월성

 
라 하거니와, 두 차례에 걸친 변화는 실상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이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정리한 데 지나지 아니한다.

한데 내성 설치 혹은 변화가 "진평왕이 왕실관계의 업무를 통일하여 독립된 관서에서 처리하게 한 것은 왕실의 전제력을 강화한 것을 보여준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뚱딴지인가? 

그렇다면 내성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왕실 전제력이 없었다는 말인가?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런 개소리가 실로 그럴 듯 하게 넘쳐나는 데가 한반도 고대사다. 저러니 욕 쳐먹어도 싸다.

다만 신라에 내성이 설치된 내력과 관련해 그 원류로 타계한 이인철이 수隋나라 전내성제殿內省制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 것이 있다는데, 이 논문을 내가 아직 숙독하지 않았으므로 곡해할 우려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우선 저 말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할 때 신라 내성이 곧 수나라 전내성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점검하자. 

전내성殿內省이란 흔히 말하기로 삼국시대 魏에서 설치한 전중감殿中監이라는 관직에서 뿌리를 찾는 것으로 알거니와, 이때는 관부가 아닌 관직이고 그 품계가 현격이 낮았다는 점에서 고려 대상은 아닌 듯하다. 이 전중감이 晉을 필두로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죽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북제北齊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관직이 아닌 관부, 곧 관공서로 독립하는데 이때 이름이 전중국殿中局이고 문하성門下省에 소속됐다.

그러다가 隋 왕조가 되면서 그 이름을 전내국殿內局으로 바꾸는데, 이는 양충楊忠 이름을 피휘하기 위함이었다. 中과 忠은 음이 같아 中이라는 글자를 의미가 비슷한 內로 바꾼 것이다. 

그러다가 양제煬帝 대업大業 3년(607)에 이르러 局을 승급해서 성省으로 격상케 하고는 묻 공봉供奉에 관한 일을 주관케 한다.

그 장관은 전내감殿內監이라 정4품이고, 그 아래 소감少監과 승丞이 있었다.

이 전내성殿內省은 상식尚食·상약尚藥·상의尚衣·상사尚舍·상승尚乘·상연尚輦의 6개 국局을 관할했다. 이 전내성殿內省이 당나라 시대가 되면서 전중성殿中省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로 볼 때 중국에 전중성 전신으로서의 전내성이 등장한 것은 607년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전내국 혹은 전중국이었다. 다시 말해 607년 이전에 (전)내성內省은 없었고, 內局이 있었다. 

따라서 진평왕眞平王 7년, 585년에 생긴 신라 내성內省이 수나라 전내성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는 언어도단이다. 생기지도 아니한 중국 관부 이름을 어찌 신라가 그걸 따서 짖는단 말인가? 

 

월성과 동궁. 이들을 합친 구역이 왕궁이다. 나아가 이런 왕궁이 신라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이는 신라의 내성內省이 중국의 전내성 혹은 그 나중 이름인 전중성殿中省에서 영향받았다는 통설 자체를 원천에서 부정한다. 설치 연대로 보면 외려 중국이 신라 영향을 받아 전내성 혹은 전중성을 만든 셈이다. 학계 일반 통설을 따른다면 그리 된다는 뜻이다. 

이로 볼 때 내성內省은 신라가 창안한 관부官府임은 명확한다. 다시 말해 신라의 창안인 것이다. 

한데 우리가 또 하나 눈을 부릅뜨야 하는 대목은 內省은 그럼에도 신라식 이름을 음대로 표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뜻 글자인 순수 한문이라는 점이다. 순한문식 관부다.

내성은 글자 그대로는 안으로 살핀다는 뜻이다. 혹은 안을 살핀다는 뜻이다. 예서 관건은 안[內] 이 어디냐이며, 省하는 대상이 무엇이냐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성이라는 관부가 관장한 일을 파헤치는 지름길이다. 

예서 안[內]은 분명하다. 궁궐이다. 궁궐 밖을 外라고 한데 견주어 궁궐 안쪽을 內라고 한 것은 불문해도 가지하다.

다시 말해 내성은 그 실체가 여전히 오리무중하지만, 궁궐 안 사무를 관장하는 부서인 것이다. 

우리는 이 관부에 內라는 접두어를 썼다는 점을 비상히 봐야 한다. 이는 궁궐 안과 궁궐 밖을 분명히 구분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궁궐 안은 왕의 독점적 주거 공간이다. 신라시대로 돌아가면 문제는 宮이 여러 개라는 점이며, 그 궁에는 왕만이 아니라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가 있었고, 그와 동부동모 형제로 갈문왕에 책봉된 이도 궁에 거주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궁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왕과 갈문왕 말고 잊은 점이 있는데, 왕의 마누라와 후궁, 그리고 때로의 왕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이들 왕실 지존들을 시봉하는 무수한 남자 하인들과 여자 몸종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성이 省하는 업무는 도대체 누구를 겨냥했을까? 왕 혹은 갈문왕일까? 아니면 왕비 혹은 왕대비였을까? 

이 점을 우리는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다. 

또 하나 "궁정宮廷 업무를 통괄하고 근시집단을 통솔하는 관청. 후대의 궁내부宮內府에 상당한다"는 학계 통설을 다시금 뿌리부터 흔들어서 다시 훑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통설을 따른다면 내성과 동시대에 병렬로 존재한 다른 부서들과 내성이 전연 차별성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본래는 품주稟主 혹은 조주祖主였다가 나중에 집사성執事省으로 고친 관부와 내성은 무엇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집사성은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관부라는 뜻인데, 이것과 내성이 도대체 무슨 차이란 말인가? 

또 직관지 下에는 무관武官으로 시위부侍衛府가 있는데 그 역할을 "궁성의 숙위 및 국왕의 수행과 경호를 담당하는 부대"로 본다는데 젠장, 이런 같은 일을 하는 부서가 어찌 내성이 있고 시위부가 따로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것이 말이나 되는가? 내성을 통째로 의심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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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사신內省私臣을 폭로하다] (1) 내성內省과 사신私臣, 그리고 내성사신內省私臣
 

[내성사신內省私臣을 폭로하다] (1) 내성內省과 사신私臣, 그리고 내성사신內省私臣

신라 관제官制에서 내성사신內省私臣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우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을 적출하면 다음과 같다. 1.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평왕본기에 이르기를 44년(서기 622) (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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