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려했던 궤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탈한 것을 찾자면, 굳이 쳐줘야 할까 싶을 정도의 아주 소소한 것이다. 가령 전공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안했던?!) 것 따위 정도가 나의 이탈 범위였다. 이런 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사실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왜 10년 넘게 다른 길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한 걸까? 정말 재미없는 삶이다!’
이런 생각이 든 이래로, 다른 직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직업을 선택했을까. 어떤 업무를 할까. 평소에는 어떤 것을 주로 생각할까. 특히 직업병에 대한 에피소드는 내가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왠지 그 직업에 대한 특징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다.
직업마다 달리 보이는 것들
전시 오픈하는 날, 우리 과의 행정직 주임님들이 어느 유물에 모여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유물이지?’ 궁금해 하며, 다가갔더니 80년대 행정문서를 보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행정문서 따위(!)는 관심이 없을 터. 예외적으로 관심을 둔다면, 대통령의 사인이 있는 정도일까? 그러나 이 문서는 그냥 일반적인 문서였을 뿐이었다. 대체 무엇이 눈길을 끌었나 했더니, 누가 문서를 기안하고 결재했는지가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그때 ‘아. 직업마다 보는 것이 정말 다르구나.’하며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각 직업별로 일종의 습관이라 할 만 한 것은 분명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직업병’이라는 단어도 생겼나보다. 그렇다면 학예사들의 직업병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직업병이라 쓰고 나니, 왠지 산업재해를 가볍게 여기는 단어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 ‘직업병’이라는 단어를 ‘습관’이나 ‘직업적 습관’ 정도로 치환하자.
그럼 다시 돌아와서, 학예사들의 직업적 습관은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을 던져두고 보니, 학예사들마다 각기 하는 일이 조금씩 다르고 전공도 다르다보니 공통된 무언가가 있을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서로 모여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 미묘한 지점을 포착하고는 “직업병이네요!”라고 말하며 깔깔 웃을 때가 있으니 분명 서로 몸이 밴 습관이라 생각이 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가장 흔한 것은 오탈자 발견하기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전시 패널을 쓰거나 도록, 교육 활동지 등을 만들다보니 글을 쓰고 보는 일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보다보면 어느 순간 오탈자를 잡아내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글에서 오탈자는 정말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 쓸데없는 습관이죠. 흑흑흑) 그 외에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너무 흔하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수평이 맞는지 여부’가 저절로 스캔되는 것 정도가 있다. 아무래도 전시장에서 그래픽의 수평이 맞는지를 계속 눈여겨보다보니 생기는 습관 같다.
나만의 습관
오탈자나 수평에 민감한 것 이외에, 나만의 습관 같은 것도 있다. 당장 떠올리니 두 개 정도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있으면 어떤 방식이든 스크랩해두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 걸기다. 딱히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나오는 것이니 습관 혹은 강박 정도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디자인과 배색 스크랩하기. 이것은 전시를 맡기 시작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어떤 책을 보거나 혹은 어떤 장소에 갔을 때, 괜찮은 디자인이 있으면 스크랩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런 디자인으로 해봐야지’ 내지는 ‘다음에는 이런 색을 꼭 써봐야지’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메라가 색을 온전히 담아두지 못할 때는 그 물건을 일부 잘라두기도 한다. 어느 날은 고디바에서 초코 과자를 먹다가 과자 포장 상자를 보고 ‘아! 이거 이번 전시 받침대 배색으로 하면 좋겠다. 잘라서 업체에 전달해줘야지.’라고 말했더니, 사무실 동료가 웃으면서 디자이너를 힘들게 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죄송합니다. 디자이너님) 어쨌든 내 책상 서랍과 집 어딘가에는 나중에 쓸 명목으로 잘라둔 포장지나 쇼핑백 등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 걸기. 이렇게 제목을 달면,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극 E 성향으로 볼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I 성향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랬다. I 중에서도 대문자 I라고. 하지만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나는 어느 순간 E의 가면을 장착한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한다. 전차에 대한 전시 주제를 맡았을 때는 택시를 탈 때마다 기사님들에게 전차를 타 본 기억이 있는지 묻곤 했다. 어떤 때는 모 서점 연말 모임에 3시간인가 4시간 동안 앉아있어 본 적도 있다. 관내 유물을 검색하는 사이트에서 전시 주제에 대해 검색했을 때, 단 한 건도 검색 결과에 걸리지 않는 좌절스러운 경험을 해본다면 누구든 나 같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외에 카페에 갔는데 어떤 컵을 보면서 ‘이거 삼국시대 토기같이 생겼다.’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 정도가 무심결에 나오는 습관이나 강박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것들이다. 호기롭게 직장에서의 습관이란 그 직업을 보여주는 것 같다 했는데 무언가 마무리가 어색하다.
마무리는 이것으로 갈음하고 싶다.
“직장에서 당신의 습관은 어떤 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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