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일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곰곰히 들여다 보면
이러한 차이의 상당부분은 중세-근세이후 만들어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공통적인 도작 문명을 근거로 발전했으며
일본의 국가성립기인 5-7세기에 상당한 문화적 영향력이 한반도에서 작용했기 때문에
7세기 말경에는 양국의 사회문화적 토대가거의 통일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양국의 동질성이 8세기 이후 크게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본 헤이안시대에 중국 당나라의 문물이 직접 수입되면서 일본이 한반도와의 동기화가 끊어진 한편
헤이안시대 말 (한국은 라말여초)의 혼란을 수습하는 국면에서 양국의 대응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언젠가 다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 후자에 대해서만 좀 써 본다면,
국왕 (일본은 덴노)을 정점으로 구축한 율령제 하의 토지제도가
사적토지 소유자에 의해 내부로부터 무너지면서 일본은 장원이 성립하기 시작하는데
한국의 경우에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를 장원이라 부르건 아니면 다른 형식의 어떤 사적 토지소유인지 모르겠지만
후삼국의 동란은 바로 이러한 문제가 터져 나온 모습이라고 보거니와
일본의 경우에는 덴노를 정점으로 한 율령제적 토지질서와
무가정권으로 상징되는 장원-사적 토지 제도의 갈등이 헤이안 말 이후 계속 반복되었고
무가정권의 수립과 변천은 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무신정변은 바로 이러한 토지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거니와
율령제적 토지제도의 질서를 사적 소유가 무너뜨리고 나올때 이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은 나말여초, 일본은 헤이안 말 이래 계속된 양국의 고민이었다 할 수 있다.
일본에는 장원을 폐지하고 율령제로 돌리려는 덴노의 시도가 계속 이어지는데
이에 해당하는 한국쪽 시도가 전시과, 과전법, 그리고 전민변정도감 같은 권문세가의 토지를 원 소유자에게 돌리려는 국가의 시도가 되겠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수백년간 계속되다가
14세기에 양국이 서로 다른 모습의 국가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나오게 되는데
바로 조선의 건국과 과전법 체제의 성립이 되겠다.
한국의 과전법 체제는
일본에서 본다면 장원정리령에 해당하는 것이 결국 전시과 체제와 과전법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과의 결정적 차이점은 일본의 경우 장원정리령이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고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결국 실패한데 반해
한국의 경우에는 율령적 질서로 토지제도를 개편하고자 하는 시도가 어찌되었건 왕조의 개창과 함께 전시과 체제와 과전법체제로
두 번 성공한 이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두 번의 율령적 질서로의 회귀는
양국의 경제적 상황에 결정적 차이를 낳았다.
물론 이렇게 표면상으로는 율령적 질서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이는 상당부분 의제적인 질서로서 그 바닥에는 토지의 소유에 의한 질서가 여전히 강고하게 온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왜 한국은 이러한 율령적 질서의 회귀가 두 차례 성공을 거두었을까?
이 문제가 사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며
한국의 지정학적 질서와도 관련이 있고
심지어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의 미래에도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맔하자면 한국사의 가장 중요한 연구 테마의 하나가 되어야 할 부분으로
이 탐구가 성공한다면 한국인에게 주어질 인문학적 지평은 엄청 넓어질 것인데
이에 대한 고찰이 아직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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