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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장원정리령과 과전법

by 초야잠필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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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喜の荘園整理令 902年(延喜2)醍醐天皇 この整理令以後の荘園を「格後の荘園」と呼び、整理の対象にした。
永観の荘園整理令 985年(永観2)花山天皇 延喜整理令以後のものを整理
長久の荘園整理令 1040年(長久元)後朱雀天皇
寛徳の荘園整理令 1045年(寛徳2)後冷泉天皇 前任の国司の在任中に立てた荘園だけ停止。
天喜の荘園整理令 1055年(天喜3)後冷泉天皇
延久の荘園整理令 1069年(延久元)後三条天皇
承保の荘園整理令 1075年(承保2)白河天皇
寛治の荘園整理令 1093年(寛治7)白河天皇
康和の荘園整理令 1099年(承徳3)堀河天皇 新立の荘園の停止(同年、康和と改元)。
天永の荘園整理令 1111年(天永2)鳥羽天皇
保元の荘園整理令 1156年(保元元)後白河天皇 荘園で使役できる農民の数を制限、「保元新制」。



일본의 장원정리령은 덴노가 명령하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적 토지소유인 장원을 율령적 토지질서로 돌려 장원을 정리해서 없애라는 명령이다. 

한국의 전시과체제, 과전법체제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으며

고려말 전민변정도감 등 장원을 해체하려는 시도도 여기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도 율령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덴노를 중심으로 공경들 사이에 꾸준히 있었다. 

율령체제에 기반한 토지질서야 말로 공경의 경제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율령체제에 기반한 토지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은 공경의 힘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장원정리령은 여러 번 반포되었는데, 1156년, 12세기 중엽까지도 나왔고, 

나와봐야 아무도 말을 안 들어 결국 유야무야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서 발생하는데, 

율령적 질서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가 한국과 일본 모두 있었지만 
왜 한국만 일시적이나마 율령적 질서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는가? 

이 부분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고려말 권문세족의 장원은, 

일본으로 치자면 역사적으로 사회악이 아닌 셈이다. 

토지의 사적소유가 공적질서를 무너뜨리는 원점이 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사적 소유, 겸병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조선건국세력에 의해 포맷된 역사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말 제대로 된 시각인가,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말 권문세족의 장원을 사회악으로만 보는 시각으로는 동양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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