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체를 이른바 직업적 학문종사자로 국한한다면, 이 분야를 개척한 주인공은 동빈 김상기다. 1세대 역사학도가 거개 그렇듯이 동빈 역시 잡탕이었다.
동빈이 지닌 가장 큰 무기는 한학漢學이었다. 그는 한문이 동시대 어떤 연구자보다 탁월했다. 서울대에 교편을 잡으면서 동양사라 특징지을 만한 일군의 학도를 길러냈고, 지금 한국에서 동양사라 하면 거개 동빈을 남상으로 삼는다.
이 동양사는 지금은 합쳐진 듯한데, 서울대에 동양사학과가 별도로 독립하고, 고려대 역시 그러했다고 기억하거니와, 아무튼 이 두 학교를 발판으로 동양사는 나름 독자성을 확보하려 안간힘을 쓰는데, 이 동양사가 탑재한 가장 큰 문제는 한국사 서양사랑 따로 노는 문제였다.
이를 역사 영역 전반, 특히 한국사를 기준으로 한국사 영역으로 급격히 포섭한 것은 중국사 연구자들이었으니, 이 중국사 연구자들은 특징이 있어 나이 들어가며 야금야금 한국사로 들어와 훗날에는 그 본령을 잃어버리고 한국사 연구자로 둔갑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이른바 재야사학 대부라는 윤내현 선생만 해도 흔히 고조선사 연구자로 통하지만, 그는 본래 중국사 정통이었다.
이 동양사가 따로 노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사 하위 영역으로 편입되어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일도 문제인데, 이 경향을 더욱 강화한 것이 이른바 중국에 의한 동북공정 사태였다.
이 동북공정에 대응한다면서 고구려연구재단이 생기고, 그 후속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하면서 동양사 연구자들이 급속도로 제도권으로 편입되어 국가사학으로 전락하는 아픔이 있다.
이건 학문 그 자체로서는 나는 망조라 본다. 물론 그에 관여한 사람들은 다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국가에 복속하는 학문은 자율성을 상실하고 프로젝트만 남는다.
그런 점에서 오롯이 내 길을 우직하게 가고, 그것 하나로 세계 학계에 우뚝선 김호동의 움직임은 괄목할 만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연은 거의 없으나, 그의 행보야말로 진짜 연구자의 그것이다.
이 얘기를 하려함이 아니었는데 또 샜다.
거란은 작금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방영 중이라 부쩍 우리네 일상에 다가왔지만, 이 거란은 학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거의 무주공산이나 나름없다.
제대로 된 이른바 전공자도 거의 전멸 상태인데, 명지대 계시던 김위현 교수가 외롭게 했고, 고려사 연구자들이 부속품처럼 논급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괄목할 만한 거란 혹닉주의를 보이는 부류가 있으니 이른바 미술사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라, 이들은 거란 이야기를 빼지 않는다.
다만 미술사라는 한정한 분야에 국한하는 바람에 내가 볼 때 그 연구라는 것들은 결코 거란 주체 거란 중심일 수가 없고 언제나 한국 미술을 선전하는 곁다리 취급할 뿐이다.
그럼에도 거란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지속하는 주류라는 점에서 이들 미술사 움직임은 의미가 있다.
나아가 고건축학 또한 응현목탑을 비롯해 거란 주된 근거지 중 하나인 산서성 일대에 적지 않은 그네가 남긴 건축유산이 있어 그 관심을 지속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더불어 언어학 쪽 움직임도 없지는 않으니, 이런 움직임들도 한 번 제대로 정리해 봤음 하지만, 내 능력이 도저히 닿지를 않는다.
고고학? 이 친구들도 다들 곁다리로 하나씩 논급은 하는데, 내가 볼 때 유의미한 구석은 없다.
다 지 필요한 쪼가리들만 끌어다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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