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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개심사 이 기둥.
각종 한국 문화 관련 책자에 한국적 건축미를 알려주는 소재로 대서특필되니, 주로 건축학도들 사기 행각이 두드러진다.
어느 목수인들 쭈쭈빵빵 소나무 노거수로 기둥 쓰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왜 이런 꼬부랑 기둥을 썼겠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있어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삐뚤이 기둥이 개심사 경내 전각 곳곳에 포진한다.
한꺼번에 개심사를 중수하다 보니 나무가 더 없었다.
가뜩이나 산림 작살 나서 쓸 만한 나무도 없었다.
(2017. 2. 5)
***
놀랍게도 이들 사진이 보여주는 장면이 조선후기 산림이랑 똑같다. 각종 증언에 의하면 각종 남벌로 조선 산림은 작살 나서 17세기 중반 이래는 전 국토가 전부 민둥산이었다.
흔히 온돌 확대를 거론하지만, 왜 17세기 이후인가? 임진 병자호란이 결정적이었다. 양란을 거치면서 곧 이어 진행한 전후 수습 혹은 전후 재건은 막대한 목재 수요를 불러온다.
이런 흐름들에 맞물려 산림은 자체 회복력을 상실하고 맨살이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금의 북한 산림 꼴과 같아 허허벌판이었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 그것이 실상 딱 어울리시는 시기였다. 쓸 만한 나무는 죄다 베어다가 써 버리니 저런 나무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저 지경을 벗어나기까지 수백년이 걸려 박정희시대가 되어 비로소 산림녹화를 이룩하기에 이른다.
산림녹화는 위대한 한민족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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