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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한국지식인 사회 고질 뜬구름 질타주의 원조는 입신양명의 다른 이름인 의리학과 미언대의微言大義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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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만신창이가 될 적에도 그 한켠에서는 죽어라고 이른바 고적古籍 정리에 종사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동시대 단재가 총칼을 들어야 한다 부르짖을 때 저들은 골방에 쳐박혀 회남자淮南子를 교석校釋하고, 대대례기大戴禮記를 주석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떼거리요 천지빼까리였다. 

 

손이양孫詒譲(1848~1908). 흔히 그를 일러 마지막 훈고학도라 하며 그 주례정의周禮正義는 그 절정이라 일컫지만, 손이양 이후 손이양은 끊이지 않으며 제2 제3의 주례정의는 쏟아진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 倭 땅에서도 임태보林泰輔 같은 이는 죽어라고 당시로서는 최신 문자자료인 갑골문을 죽어라 파고 들었고, 롱천자언瀧川資言, 일명 롱천구태랑瀧川龜太郎(1865~1946) 같은 이는 죽어라 史記 정리에 혼신을 쏟아 사기회주고증史記会注考証이라는 불굴의 업적을 쌓았다.

그런 사람이 떼거리요 천지빼까리였다. 

이 땅에서 저런 일에 종사한 이는 한 놈도 없었다.

 

19세기 후반 은허殷墟에서 이런 갑골문이 쏟아질 바로 그때 왜 땅에서도 죽어라 그에 매달린 연구자가 있었다. 그 시대 조선 땅에 그런 연구자는 한 명도 없었으니, 왜 없었을까? 그것을 연구할 지적 토양이 전연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는커녕 저 탱자탱자 훈수주의 고수하며 죽어나사나 공맹을 되뇌이며, 산림山林입네 하는 전통이 남아 진득이 공부하는 놈은 한 놈도 없고 모조리 정치판 기웃대며 도덕론을 들먹이며 자고로 정치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 팔아먹는 일로 소일할 뿐이었다. 

훈고와 고증이 밀려난 자리에 의리학과 미언대의微言大義만 득시걸거렸다.

비록 결과론일 수는 있어도 훈고訓詁는 고물에 매달리는 상고주의 사조만은 아니었다. 주희가 개척한 의리학과 미언대의가 공맹과는 멀어진 뜬구름 잡는 얘기이며, 그런 까닭에 그것에 더욱 가까이가기 위해서는 그에 물들지 아니한 그 시대로 찾아가야 하며, 그리하여 그 타겟층으로 한당漢唐 주석을 지목하며, 그 한당을 고리로 공맹의 육성에 직접 다가가고자 했으며, 나아가 그 육성이 공맹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있음을 비로소 알아차린 그 시대정신은 새로운 시대정신과 절묘하게 결합했으니, 그런 점에서 나는 훈고가 과학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본다. 

이 땅이 빗장을 열었을 적에 이웃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그런 새로운 과학시대와 결합할 훈고 같은 토양 자체가 없었다. 

이 전통의 부재는 사회참여 앙가주망이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지식인을 책상 대신 현실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정치판으로 내몰았으니, 창작과비평(창비)과 역사비평(역비)은 그 자체 그 시대 위대한 승리일 수는 있지만, 이 땅에서 진득이 의자와 책상에 눌러앉아 진물이 나와야 할 연구자를 영원히 추방하고 그 자리에 정치를 주물한 괴물이었다.

누군가의 말을 빌린다면 이 땅에서 학문은 "정권요직에 들어갈 번호표 뽑고 순서를 기다리"는 산림 대기소일 따름이다. 

이 땅에서 학문은 연구가 아니라 오로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도구였을 뿐이며, 그 유구한 전통이 21세기 오늘에도 한 치 변함이 없다.

명색이 학문을 한다는 자들이 학문하는 모습은 도통 볼 수가 없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저곳 sns에 출몰하며 정치를 향해, 사회를 향해 구토나는 훈수를 늘여놓으며, 또 그것으로 구축한 얄팍한 명성을 고리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꼴이 우연이겠는가? 

이 전통이 근대 학문 중에서는 이 땅에서 그 역사가 가장 일천하다 할 만한 고고학으로도 이어져 armchair archaeology를 경멸하는 일이 진정한 archaeologist인양 행세하는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세상을 흔들고 세계를 주름잡는 연구는 armchair에서 나오지 site에서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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