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사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식민 (사민)과 저쪽에서 이쪽으로의 유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 없이도 우리쪽에서 자발적으로 도주한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의 역사도 무시할 수 없다.
가까이는 조선 후기 청의 봉금封禁 지대로 목숨을 걸고 숨어들어 농사를 짓던 조선인들도 이런 범주에서 해석할 수 있으며 멀리는 금金나라 완안부完顏部 시조 함보函普(10세기 초)나, 조선 왕조 사실상 중시조인 이안사李安社(목조穆祖. ?~1274)는 모두 이런 부류에 속한다.
함보는 한반도에서 간 것이 아니라 여진족 전승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일제시대 관학자들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제기된 것으로 아는데 조선 중시조 이안사의 예를 보면 한반도로부터의 도망자 함보는 충분히 존재했을 법한 사람이다.
전승에 의하면, 함보는 나이 60에 여진 땅으로 들어가 후손을 남겼는데 그 친척들은 여전히 한반도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안사는 원래 전주에 살던 사람으로 잘 알다시피 현지 관리와 싸움이 붙어 먼저 삼척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함흥 근처 의주宜州로 북상하고, 그 다음에는 두만강 유역 알동斡東까지 이동하여 그곳에 정착해 실력자가 된다.
이안사 행적을 보면 한반도에서 이동하여 현지 유력자가 된 함보 및 그 일족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라말여초부터 여말선초까지 이런 류의 도망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특히 조선시대 여진족 중에는 김씨, 박씨 등 한반도계 성을 쓴 사람이 많은데 이를 여진족이 한반도 성을 모칭했다고 지레 짐작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실제로 한반도에서 이동해 간 사람들 후손일 가능성을 함부로 배제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심지어 한반도로 들어온 발해 유민 중에도 朴씨가 있다는 점이다. 다른 성이야 중국 성과 비슷하니 모칭이라 해도 朴씨라면 한반도에서 넘어간 발해인 아닌가? 실제로 고려초 귀화한 발해 유민에는 한반도 성 비스무리한 사람이 꽤 있다.
三月 戊申 渤海人金神等六十戶來投.
是歲, 渤海人朴昇, 以三千餘戶來投.
이렇게 본다면 고려초에 한반도로 귀화한 朴씨는 함보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 사람 후손임을 배제할 수 없겠다. 여진족에만 한반도계 이주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발해에도 남쪽에서 넘어들어간 이주민들이 있었음직 하다는 이야기다.
변경사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의 하나겠다.
**** 편집자注 ***
이안사는 볼수록 이름이 특이하다. 安社는 글자 그대로는 사직을 안정케 했다는 뜻인데, 어째 조선왕조가 개창한 다음에 얻은 시호 같은 느낌을 짙게 준다.
그 아들 행리行里는 이름이 가는 거리, 곧 여정이라는 뜻인데, 이 또한 조선왕조가 정리한 그의 인생 역정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안사건 행리건, 영 께름칙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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