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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이 증언하는 광개토왕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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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천 자 비석이라 할 만할 듯



황성교를 바라보다〔望皇城郊〕

성현成俔(1439~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허백당시집虛白堂集詩集> 제13권 시詩권


긴 강가에 너른 평야 아득하게 펼쳐지고 / 平郊渺渺長江湄
산이 돌고 물 굽이져 경치가 뛰어난데 / 山回水複多淸奇
어느 시대 영웅이 여기 와서 할거하여 / 何代英雄來割據
지금까지 황성의 기내畿內라고 불리는가 / 至今猶謂皇城畿
흑룡강 왕기 마치 철과 같이 견고하니 / 黑龍王氣堅如鐵
속저의 큰 사업이 마침내 쇠퇴했고 / 屬猪大業冬業衰
하찮은 강좌로는 대적할 수가 없고 / 區區江左抗不敵
중원이 복속되어 오랑캐 땅 되었구나 / 中原左衽皆胡夷
왕업 근거지에 도읍을 정한지라 / 興王之地大都邑
높은 성첩 큰 궁궐이 험한 산에 기댔으니 / 崇墉傑殿憑險巇
백만 공경과 장수 집안에서 / 公侯將種百萬家
부귀영화 누리면서 좋은 시절 만끽했지 / 鍾鳴鼎食春煕煕
흥망이란 순간이라 허무하게 멸망하여 / 興亡一瞥就滅沒
무성한 초목 속에 옛터가 묻혔구나 / 茂林豐草埋遺基
언덕처럼 돌을 쌓아 황제 무덤 만들어도 / 累石如丘作帝冢
목동에게 많은 보물 도굴되고 말았어라 / 金多竟遭牧豎兒
번화한 자취들은 물어볼 데가 없고 / 當時蹤跡不可問
천 자나 되는 비만 우뚝하게 섰네 / 巋然惟有千尺碑
지척에 강이 흘러 천연 해자 되니 / 江流咫尺隔天塹
한스럽게 옛 비석을 읽어 보지 못하누나 / 恨不讀字摩蛟螭
여기 와서 한량없이 옛일을 슬퍼하며 / 我來弔古意不歇
석양에 말 세우고 부질없이 시를 읊네 / 駐馬斜陽空賦詩


[주-D001] 황성교皇城郊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평안도 강계도호부에 속하며 만포滿浦에서 30리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또 금金나라가 도읍했던 곳이며, 금나라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는 황제묘皇帝墓가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실록,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는 모두 황성평皇城坪으로 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지도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포와 마주 보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주-D002] 至今猶謂皇城畿 : 대본에는 ‘至今猶爲謂城畿’로 되어 있는데, 착간으로 판단되어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03] 흑룡강(黑龍江)의 …… 견고하니 : 이 구절은 말갈족 한 갈래인 생여진生女眞이 흑룡강 일대에 근거하여 강성한 힘으로 금나라를 일으키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흑룡강은 과거 전통 시대 중국의 동북쪽 지역으로, 몽고인민공화국 북부와 중국 내몽고자치구의 대흥안령(大興安嶺)에서 발원하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되며, 중국에서는 헤이룽 강, 러시아에서는 아무르 강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예로부터 왕기(王氣)가 서린 곳으로 일컬어져서, 중국의 마군무(馬君武, 1881~1940)는 〈거국사(去國辭)〉에서 “흑룡강에 왕기가 자욱하게 감도는데, 아득한 중국 땅엔 혁명의 거센 물결.〔黑龍王氣黯然銷 莽莽神州革命潮〕”이라고 한 바 있다.

[주-D004] 속저(屬猪)의 …… 쇠퇴했고 : 송나라가 금나라 침략을 받아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사로잡히고,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 임안(臨安)에 천도한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속저가 대본에는 ‘蜀猪’로 되어 있는데, 전사(轉寫) 과정에서 빚어진 오류로 판단되어 고쳐 번역하였다. 속저는 송나라 태조와 그 뒤를 이은 태종이 모두 해년(亥年)에 태어났기 때문에 송나라의 별칭으로 쓰인다. 《古今釋林 卷5 歷代方言 釋國》 구절 내의 ‘冬業’ 역시 대본 자체의 오류로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근거를 찾지 못해 그대로 두고 전체적인 뜻만 번역문에 담았다.

[주-D005] 하찮은 …… 되었구나 : 송나라가 양자강 남쪽 임안으로 천도하여 영토 회복을 기도했지만, 끝내 금나라를 이어 들어선 몽골족, 즉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6] 丘 : 대본에는 ‘兵’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07] 冢 : 대본에는 ‘家’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08] 천 …… 있구나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황성평皇城坪에 황제묘皇帝墓가 있는데, 전해 오는 말로는 금나라 황제의 묘라고 하는데 돌을 갈아 만들었다. 높이가 10장(丈)이나 되고 안에는 침상이 셋이 있다. 또 황후묘와 왕자묘가 있다.”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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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광개토왕비


이 시가 아마도 광개토왕비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지적을 많이 본 듯한데,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관내 순찰에 나선 성현이 만포에 이르러 읊었다.

제목이 망황성교望皇城郊라 했으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그 건너편 황성교를 읊은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당시 조선 국경선이 압록강이었으므로, 관찰사가 위수 지역을 이탈해 그 건너편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왜 성현은 지금의 집안을 염두에 두고 "천 자나 되는 비[千尺碑]"를 거론하면서 "지척에 강이 흘러 천연 해자 되니[ 江流咫尺隔天塹] 한스럽게 옛 비석을 읽어 보지 못하누나[恨不讀字摩蛟螭]"라고 읊었을까?

문맥으로 보아 만포진 앞으로 가로지르는 압록강이 자연 해자가 되어 가로막으니 그곳으로 갈 수도 없고, 따라서 그곳에 있다는 천 자나 되는 비석을 읽어볼 기회가 없다는 한탄으로 들린다.

그가 선 만포진에서 30리가량 떨어진 지점 광개토왕비가 보일 리 만무했을 테고, 아마도 저쪽 건너편에 열라리 큰 돌 비석 하나가 있다는 말을 그 지역 사람들한테 들은 듯하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5권 평안도平安道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 【산천】 조에 이르기를


황성평皇城坪 : 만포滿浦에서 30리 거리가 되는 곳으로 금金 나라가 도읍한 곳이다. 황제묘皇帝墓 : 황성평皇城坪에 있으니, 세상에서 전해 내려온 말로는 금金 나라 황제묘라 하는데 돌을 갈아 만들었다. 높이가 가히 10장이고 안에는 침상이 셋이 있다. 또 황후묘와 왕자묘가 있다.

라 했는데, 이에서 말하는 황성평이 곧 집안 국내성으로 보인다.

황제묘라고 하는 것은 그 기술로 보아 장군총 같은 고구려 계단식 적석총을 이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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