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무장해제 후에는 어떻게 될지 전혀 비전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베트남도 45년 8월 15일 이후, 힘의 공백기가 만들어졌는데
그 공백의 정도는 일본제국의 지근거리에 위치한 조선의 경우보다 훨씬 강력했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진주한 군대가 북쪽의 중국군과 남쪽의 영국군이라는 점에서 소련과 미군이 진주한 한반도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베트남이 45년 8월 15일 이후, 가장 두려워 한 것은 2차대전 이전 이 지역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비시정권 이후 드골의 자유프랑스가 연합국-승전국의 편에 섬으로써
베트남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해방과 함께 추축국 일본이 궤멸되어 사실상의 식민모국이 공중분해 되어버린 조선과는 상황이 달랐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호치민의 베트민은 8월 16-18일 사이에 봉기를 일으켜 하노이를 점령하고,
9월 2일에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북베트남이다.
이러한 정황은 한국의 해방정국에서 건준을 떠올리게 한다.
건준이 해방 이후, 군정과 아무 연락 없이 전국적 조직의 구성을 획책하고,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인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소위 인공의 수립을 선포한 것은,
베트남의 베트민의 움직임과 거의 방불하다고 볼 수 있다.
80년대 해방전후사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소위 건준을 크게 띄운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베트남의 해방전후사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필자는 본다.
왜냐하면 건준 자체는 80년대 이전에는 주목받던 해방정국의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건준이 학계 일각에서 일약 해방정국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건준을 '자생적 독립국을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고, 이를 부정하는 세력은 모두 '반민족적, 제국주의적'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건준이 처한 상황이 과연 베트남의 베트민과 동일하였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한국은 베트남의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은 종전 이후, 군정이 시작될 때까지 카이로-포츠담 선언에 기반한 조선독립의 전망에 변화가 생길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건준의 여운형보다 훨씬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승만, 김구, 그리고 김일성까지도,
종전이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해서야 국내로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당시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연합군의 군정이 독립으로 가는 과정에서 과도기적 성격이 있었음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가 다시 돌아와 식민통치를 재개할 가능성이 있던 베트남과,
카이로 선언 이후 독립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던 한국의 상황을 동일하게 보고,
베트민과 건준을 동일하게 간주하여 이에 맞서는 세력을 모두 반민족, 제국주의적 세력으로 간주하는 시각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방군과 점령군 사이, 미군정명령 1호를 둘러싼 어처구니 없는 오역 (0) | 2023.09.09 |
---|---|
프랑스가 문제였던 인도차이나 (0) | 2023.09.09 |
카이로선언이 운명을 가른 한국과 베트남 (0) | 2023.09.08 |
해방전후사: 베트남의 경우 (0) | 2023.09.08 |
재발견하는 김밥, 한때는 천대받던 한국문화의 표상 (0) | 2023.09.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