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태종무열왕 김춘추 아들로 적자 6명 중 유일하게 훗날 최고위직 재상인 각간까지 올라간 인태仁泰만큼은 정부인 문희(김유신 누이) 소생이 아님을 봤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인태는 엄마가 누구인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저이의 출생 비밀이 화랑세기를 통해 마침내 폭로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춘추는 아버지가 두 명이라, 생부는 용수龍樹지만, 그 친부가 죽자 어머니가 용춘龍春한테 개가하는 바람에 그의 양아들이 된다.
용수와 용춘은 형제다. 용수가 형이고 용춘이 친동생이다.
생부와 양부 중 보통 아들이 즉위하면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지만, 이 경우는 달라서 김춘추는 왕이 되자마자 생부는 제껴 버리고 양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존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음 자리서 살피기로 하고, 이런 양아버지 용춘이 13세 풍월주를 지내니 그런 화랑들의 역대 전기인 화랑세기에는 당연히 그의 전기도 있다.
그의 전기 용춘공龍春公 전에 보이는 구절이다.
(용춘의) 서자 5인 중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은 대씨大氏가 낳았다. 용귀龍貴는 미생공의 딸 매생梅生이 낳았다.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은 비보랑공의 딸 홍주紅珠가 낳았다. 서녀 18인 중 용산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을 섬겨 인태仁泰 각간을 낳았다.
용춘은 정식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춘추를 양자로 입적한 것이다. 법적으로 용춘 아들이 된 것이다.
용춘은 정부인과 사이에 아들을 두지 못한 대신, 첩들한테서는 아들 다섯을 두었다.
그 다섯 서자가 용산龍山·용석龍石·용귀龍貴·용주龍珠·용릉龍凌이다. 첩 중에서도 화랑세기에서는 대씨大氏라고만 하는 저 인물이 상장돈장에는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대철大哲이다. 남자 이름 같은데 여자다.
첩들한테서 딸은 무지막지 많이 둬서 무려 18명에 이르렀다. 이걸 보면 용춘은 분명 씨가 아들보다는 딸을 두는 쪽에 유전작적 특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혹 이에 대한 유전학적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다.
말이 나온 김에, 하긴 이것도 좀 이상한 게 김유신의 경우 조강지처한테서는 1남 4녀를 두었지만, 애송이 조카딸 지소 공주를 맞아들여서는 아들만 줄줄이 사탕처럼 깠으니, 이것도 모르겠다.
한데 서녀 18명 중 굳이 용태龍泰만큼은 실명을 밝혔으니, 그가 바로 인태 각간 엄마인 까닭이다. 인태가 차지하는 위치가 워낙 막중한 까닭에 그 이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태의 엄마가 밝혀졌다 해서 나머지 남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의 엄마 대씨는 분명 용춘의 첩인데, 그 소생 딸 또한 서녀임이 분명하고, 실제 화랑세기에서도 서녀라 밝히고 있는데, 그런 서녀가 김춘추한테는 분명히 첩이었을 텐데 어찌하여 그 소생인 인태는 적자 대접을 받았을까?
이 점을 나로서는 아직 해명하지 못했다.
다시 묻는데 이래도 화랑세기가 우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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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아들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김인태金仁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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