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포스팅 마운령과 더불어 항상 짝으로 등장하는 고개가 황초령이다.
기후 때문에 이 일대 풀은 언제나 누렇게 떠서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는 모르겠다. 황초령 역시 조선시대 문집을 통해 드러나는 양상을 보면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관문 중 하나다.
이 황초령은 어떤가?
식민지시대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조사한 자료들을 보면 그것이 발견된 지점이 해발 1,100미터 지점인가 그렇다.
진흥왕 순수비 중에서는 해발 고도가 가장 높다. 내가 현장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유다.
구글맵을 통해 보니, 그 고갯길 근방에는 황초령역이 있다. 그리고 지도 굴광선을 살피면, 이곳엔 고갯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황초령을 넘어야 백두산으로 간다.
마운령이건 황초령이건 그 너머는 야만이 사는 곳이었다. 이 야만을 장착한 이들이 여진이다.
마운령 황초령 너머 산 여진족은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예외없이 해로를 이용해 강릉을 치고 경주를 친다. 이를 보면, 신라가 이미 상고기에 저들 지방으로 진출한 힘이 해로였음을 단박에 안다.
강릉 가는 길은 육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더 효율적인 방법은 경주쪽에서 배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신라가 마운령 황초령 일대로 진출하기는 진흥왕 때가 아니다. 이미 그 이전 100년은 훨씬 더 거슬러올라간다. 자비왕 소지왕 무렵에는 이미 저 쪽을 장악했다. 내물왕 무렵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이를 극적으로 증언하는 사건이 있다. 고구려 인질 복호를 구출한 박제상이 탈출하는 통로다. 박제상은 그 현 위치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의 강원도 고성으로 들어가서, 고성에서 배를 타고 경주로 귀환했다. 이는 고성이 이미 눌지왕 시대에 신라 영역인 증거다.
왜 황초령인가?
구글맵을 보면 그 일단이 드러나지 아니한가?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는 고구려 영역에 대한 상식을 전복한다.
나는 고구려가 동해안으로 진출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바다는 언제나 지금의 서해와 요동만이었다.
동해가 동천왕 때인가 잠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동해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동해는 아닌 듯하다.
(2017.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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