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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황초령黃草嶺, 문명과 야만의 또 다른 관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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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포스팅 마운령과 더불어 항상 짝으로 등장하는 고개가 황초령이다.

 

황초령

 
기후 때문에 이 일대 풀은 언제나 누렇게 떠서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는 모르겠다. 황초령 역시 조선시대 문집을 통해 드러나는 양상을 보면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관문 중 하나다.

이 황초령은 어떤가?

식민지시대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조사한 자료들을 보면 그것이 발견된 지점이 해발 1,100미터 지점인가 그렇다.

진흥왕 순수비 중에서는 해발 고도가 가장 높다. 내가 현장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유다.


황초령

 

구글맵을 통해 보니, 그 고갯길 근방에는 황초령역이 있다. 그리고 지도 굴광선을 살피면, 이곳엔 고갯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황초령을 넘어야 백두산으로 간다.

마운령이건 황초령이건 그 너머는 야만이 사는 곳이었다. 이 야만을 장착한 이들이 여진이다.

마운령 황초령 너머 산 여진족은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예외없이 해로를 이용해 강릉을 치고 경주를 친다. 이를 보면, 신라가 이미 상고기에 저들 지방으로 진출한 힘이 해로였음을 단박에 안다.

강릉 가는 길은 육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더 효율적인 방법은 경주쪽에서 배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황초령

 
신라가 마운령 황초령 일대로 진출하기는 진흥왕 때가 아니다. 이미 그 이전 100년은 훨씬 더 거슬러올라간다. 자비왕 소지왕 무렵에는 이미 저 쪽을 장악했다. 내물왕 무렵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이를 극적으로 증언하는 사건이 있다. 고구려 인질 복호를 구출한 박제상이 탈출하는 통로다. 박제상은 그 현 위치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의 강원도 고성으로 들어가서, 고성에서 배를 타고 경주로 귀환했다. 이는 고성이 이미 눌지왕 시대에 신라 영역인 증거다.

왜 황초령인가?

구글맵을 보면 그 일단이 드러나지 아니한가?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는 고구려 영역에 대한 상식을 전복한다.

나는 고구려가 동해안으로 진출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바다는 언제나 지금의 서해와 요동만이었다.

동해가 동천왕 때인가 잠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동해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동해는 아닌 듯하다.


(2017.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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