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판 결과에 따라 이제 고려 거란은 새로운 관계에 접어들었다. 그 이전 고려는 명목상 종주국을 宋을 삼았지만, 협약에 따라 이제 종주국을 거란으로 바꿔야 했다. 대신 고려는 여진이 점거한 청청강~압록강 유역 땅을 할양받았다.
두 군대가 철군한지 몇 달이 지난 고려 성종成宗 13년 2월, 거란에서는 저번 특사 겸 고려정벌군 총사령관 소손녕蕭遜寧 명의로 고려 조정으로 편지 한 통을 날린다.
“근래에 황제의 명[宣命]을 받들기를, ‘다만 고려 신의와 호의로써 일찍부터 통교通交하였을 뿐 아니라 국토도 서로 맞닿아있노라. 비록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데에 반드시 규범과 의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작을 잘 궁구하여 마지막을 잘 맺는[原始要終] 길은 모름지기 〈우호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데에 있다 하겠다. 만약 미리 대비책을 세워두지 않는다면 사신의 왕래가 도중에 막히게 될까 염려되니, 이에 저 나라와 더불어 상의하여 요충지가 되는 길목에 성城과 해자垓子를 만들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거란 황제가 고려국왕한테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손녕 명의로 고려국왕한테 보낸 것은 가오 때문이라 본다. 동급이 아니라 여긴 까닭 아니겠는가?
편지(라 하지만 실제는 외교문서)는 이어진다.
황제의 명에 따라서 스스로 헤아려보니 압록강 서쪽 마을에 5개 성을 축조하면 좋을 듯하여, 3월 초에 성을 쌓을 곳에 가서 축성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 먼저 〈신하들을〉 거느리고 안북부安北府에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르는 280리 사이에 적당한 곳을 답행踏行하여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시고, 아울러 성을 쌓도록 명하여 역부役夫들을 징발해 보내어 동시에 시작하게 하시며, 쌓아야 할 성의 총 수를 빨리 회신하여 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일은 수레와 말이 오가게 하여 멀리 조공을 위한 길을 열고 영구히 조정을 받들어 편안하게 할 계책에 스스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확실히 전쟁을 종식하는 대가로 두 나라가 밀약한 내용이 엿보인다.
압록강을 경계로 그 동쪽 지점은 거란이 고려에 국토를 할양한 것이다. 이곳은 여진이 할거하는 땅이라, 거란으로서도 실은 크게 손해 본다 생각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여진이 거란에 신속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직접 통치를 하는 것도 아닌 마당에 모로 가나 바로 가나 거란은 얻을 것만 확실히 챙겼으니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밀약에 따라 두 왕조는 이제 교통로 개척에 나선 것이다.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그 동쪽은 고려가 적절한 지점들을 골라 성을 쌓고, 대신 거란 역시 동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점 길목마다 성을 쌓기로 한 것이다.
자칫 사전 통보 없는 일방적인 성 쌓기는 오해를 사는 까닭에 사전에 통보를 하고, 시점까지 정해서 우리 이 시기에 같이 성을 쌓아서 오해가 없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이걸 보면 협약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상응하는 고려 쪽 움직임은 곧바로 공포된다.
이런 외교문서가 오간 바로 그 시점 그 달인 같은 해 2월 고려가 거란 연호를 채택한 것이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을 건국한 때가 916년, 그로부터 물경 80년이 흘러 고려가 공식으로 거란의 외신外臣이 된 것이니 이 얼마나 거란으로서는 감격해마지 않겠는가?
동방 코딱지 만한 나라가 신속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거란 같은 대제국한테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천만에. 그때나 지금이나 외교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오! 다. 이 가오에서 바로 디그너티가 생기는 법이다.
제국 거란에 고려는 언제나 암덩이였다. 그런 암덩어리 고려가 마침내 신속하겠다고 나섰으니, 이건 곧 그들한테는 동방 안정인 동시에 국력을 다른 지점에 쏟게 하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연호를 사용하느냐 마느냐는 그만큼 중차대한 상징을 지니는 실질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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