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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AI로 증폭한 ‘요화妖花’ 배정자

by taeshik.kim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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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연구자로 유명한 정운현 형이 마침 근자 여러 남자를 전전한 배정자라는 여인 이야기를 정리한 글을 올렸으므로

심심해서 요새 재미 붙인 AI 사진 증폭 기술을 이용해 과연 저 여성이 어떤 면모를 지녔기에 그리 식민지시대 어간에 그리 유명세를 구가했는가를 구명해 보고자 했다. 

앞 사진이 그런 대로 젊은 시절 한창 주가 날리던 시절이라 해서 제공하는데 이걸 증폭해 봤다. 
 

 
이렇게 복원한다. 

좀 더 좋은 어플을 돌리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듯한데 이 정도로 만족한다. 

다시 얼굴 누끼만 따보기로 했다. 아래와 같다. 
 

 
전형적인 馬像, 말상이다. 

저 시대에 쌍꺼풀 수술은 없었을 테니 자연산이라 보거니와 쌍꺼풀이 뚜렷하고 눈알맹이가 큰 편이다. 

저 여인을 흔히 요부라 하고, 한국의 마타하리라 하는데, 그건 평자들 몫에 맡기기로 한다. 

참고로 정운현 형이 정리한 글은 아래와 같다. 





 
<‘요화(妖花)’ 배정자 취재 후일담>
- 그의 ‘남성 편력’과 얼굴 사진 발굴


흔히 ‘조선의 마타하리’로 불린 배정자(裵貞子, 1870~1951)의 이름 앞에는 ‘요화(妖花)’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붙어 다니곤 한다. 그는 미모를 무기로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만난 최고위급 남자는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였는데, 그는 이토의 수양딸 겸 애첩 노릇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배정자를 거쳐 간 남성들을 살펴보면, 첫 남자는 한때 그가 관기(官妓)로 있으면서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의 아들 전재식과 결혼하여 전유화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다. 두 번째 남자는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 현영운과 1년 정도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 박영철(일본 육사 15기생, 함북도지사, 중추원 참의)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이혼하였다. 

이후 배정자는 일본인 오하시, 은행원 최 아무개, 전라도 갑부 조 아무개, 대구 부호의 2세 정 아무개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중국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 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정자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탄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가담했다. 해방 후 1949년 2월 초, 반민특위 활동 개시 초기에 그는 성북동 집에서 체포되었다. 반민특위에 붙잡혀온 여성 피의자는 총 6명이었는데 그는 첫 번째로 붙잡혀왔고, 급이 제일 높았다.

필자는 1998년 8월 <서울신문>으로 옮겨 친일파 장기 연재를 하였다. 그때 배정자의 생몰과 가족관계 취재를 위해 종로구청에 가서 그의 제적등본을 신청했더니 한 뭉치의 빛바랜 호적 서류를 보여주었다. 그 시절만 해도 민원인이 이런 서류의 원본을 열람할 수 있었고, 심지어 복사도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정자는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사진 한 장이 공개된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역사 연구자들은 대상 인물의 문서자료는 열심히 찾으면서 사진 자료 수집은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유명한 친일파들도 사진 한 장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런 와중에 중국 측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배정자 얼굴 사진(위쪽)을 발굴해 신문 연재 때 이를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오늘, 1910년대 <매일신보> 기사를 살펴보다가 배정자를 다시 만났다. 배정자는 1916년 12월 4일 경성(서울)에서 조병훈(趙秉勳)과 결혼식을 올렸다. 조병훈은 전라도 출신으로 ‘일선상회(日鮮商會)’ 상점 주인이었는데 그간 알려진 ‘전라도 갑부 조 아무개’가 바로 그인 셈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기사에 배정자의 얼굴 사진(아래쪽)이 실렸다. 당시 배정자는 48세, 조병훈은 4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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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과 최후)

배정자는 반민특위가 업무를 개시(1949.2.9.)한 지 얼마 뒤인 2월 18일 성북동 자택에서 특위의 강명구 조사관 일행에게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특위의 조사를 거쳐 특별검찰부에서 4월 16일 기소하였으며, 특별재판부의 재판을 받던 중 그해 6월 6일 소위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특위가 와해되면서 8월 29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종로구청에 보관된 그의 호적서류에 따르면, 그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 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묘하게도 그는 사망 일자와 출생일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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