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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11세기 탐라가 독립왕국인 시절 남긴 사찰과 그 흔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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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려시대 절터서 '금동다층소탑' 등 유물 발견
변지철 / 2023-01-26 12:12:41
"구전 절터 실체 확인…상태 양호한 금동소탑 의미 매우 커"

https://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51076333459

제주 고려시대 절터서 ′금동다층소탑′ 등 유물 발견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제주의 고려시대 절터에서 금동다층소탑과 중국 북송시대 동전 등 유물이 발굴됐다.대한문화재연구원은 사유지인 제주시 오등동 250-8번지 일대 유적 발굴 조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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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 강조하는 말이지만, 또 가장 기본 사항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 맨 먼저 그 위치를 찾아 봐야 한다. 특히 사면이 바다인 제주 같은 섬에서는 해안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가 그 성격을 가늠하는 열쇠일 수 있다.

바다에 인접한 지점이라면 해상을 무대로 삼아 그 해상과 육상을 연결하는 지점 모종의 보세 창구 혹은 물자 보급 혹은 해상 안전 항해 기원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사찰이라면 이런 데 뿌리 박은 사찰은 틀림없이 관음신앙과 관련이 깊다.



이번에 문제의 저들 유물과 건물 흔적이 나왔다는 제주시 오등동 250-8번지를 네이버지도에서 검출하니 저렇다. 약간 묘하다.

바다와 인접한 지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단, 이 경우에도 근현대 이래 간척이 적지 않았으므로 현재의 해변선을 근거로 그것이 항구 역할과 관련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좀 더 자세히 본다.



현재의 제주 시 중심 구역 남쪽이 한라산 기슭과 만나는 지점이다. 따라서 저 위치로만 보면 저 고려시대 사찰은 해상 안전운항 기원 운운하는 기능보다는 산중에 기댄 산중 지향 사찰이 아닐까 하는 심증을 굳게 한다. 말하자면 진짜 도량으로서의 기능 말이다. 그쪽이 더 강한 듯한 인상을 나는 지도에서 받는다.

어찌하다 육지를 무대로 암약하는 (재)대한문화재연구원이 제주 소규모 발굴까지 치고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그렇다고 이 연구원이 썩 제주와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아주 일찍이 제주 발굴을 한 전과가 있다.) 암튼 문화재청이 지원하는 소규모 국비지원 발굴조사 사업 일환으로 문제의 오등동 유적을 파제낀 모양이라 그 결과를 보도자료를 통해 언론에 배포 공시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토대로 이 유적을 오등동 절터 유적이라 임시 방편으로 이름한 듯하다.

유적 전경. 이하 모든 사진은 대한문화재연구원 제공이다.


제주 아라동(오등동)에 위치한 이곳은 본래 현지에서는 ‘절왓’ 또는 ‘불탄터’라 일컫던 곳이라 하는데, 신통방통하게도 발굴조사 결과로도 중요한 절이 있던 곳으로 드러났댄다.

암튼 좁은 면적을 팠더니 건물터만 해도 여러 기가 중첩한 듯, 개중에서도 가장 먼저 지은, 그러니깐 맨밑바닥에서 확인한 3호 건물지라 이름한 지층에서는 중국 북송시대에 제조 유통한 동전꾸러미 20점 안팎이 한 군데서 쏟아지는 바람에 이 건물이 언제 만들어져 활용되었는지를 가늠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동전 출토



동전을 구체로 보면 함평원보咸平元寶, 황송통보皇宋通寶, 치평원보治平元寶 세 가지로 모두 11세기 전·중엽에 중국 북송시대 유통한 놈들이다. 더 구체로 보면 함평원보는 북송 진종 함평 년간 (998~1003), 황송통보는 북송 인종 황송 년간(1039~1054), 그리고 치평원보는 북송 영종 치평년간 (1064~1067)에 각각 주조 발행됐다.

이로써 보면 3호 건물은 저 시대, 그러니깐 북송시대 11세기에는 이미 들어서 활용 중이었음을 추찰한다. 저 건물이 만약 절을 구성하는 일부라면, 11세기 고려 전기에 제주에는 불교가 들어와 성행했음을 엿보인다 하겠다.

3호 건물은 화재로 소실됐다고 파악된다. 한데 그런 화재 과정에서 훼손되고 묻힌 것으로 추정하는 금동 다층 소탑 金銅多層小塔이 드러났다. 지붕 위 용머리와 잡상, 와골, 난간, 창, 창틀구조가 잘 남아 고려시대 목탑이나 건물을 복원하는 중요 자료라고 조사단은 평가한다.

다만 맨 아래층 탑신塔身 아래 기단 쪽과 복발 위 상륜이 아직 수습되지 않은 상황이라 온전한 모습을 찾는다면 이 또한 매우 중요한 그 시대 증언이 될 수 있음을 毋論이다.

금동 다층소탑 전체와 파편들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이 3호 건물이 폐기된 이후에도 다른 건물이 들어선 흔적을 찾았으니, 두 차례 중창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 원대元代(1271∼1368)에 제작한 청자와 전남 강진 가마들에서 생산한 청자 등이 그 증거라고 한다.

제주라고 하면, 멀리는 백제 중기 이래, 그리고 이후 신라시대 이래 죽죽 고대 한반도 문화권이며 그 일부라 여기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라, 그네들이 반도에 자리 잡은 왕조국가들에 신속臣屬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시대 중기까지 직접 지배를 받은 일은 없다.

그때까지 그들은 한반도를 비롯한 인접 문화권과 끊임없이 교유하면서도 독자 정권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유적과 인근


그런 탐라가 한반도 왕조국가 영역에 완전히 포섭되기 시작한 시점은 이른바 대몽항쟁기와 이후 한동안 전개된 이른바 원 간섭기다. 이른바 삼별초에 의한 반란은 탐라 역사의 획기였다.

그를 통해 제주는 고려왕조가 직접 지배를 관철하는 지역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때도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지는 않았다.

그런 탐라가 원 간섭기가 되면서, 원 제국 아래 들어가 원에다가 조달하는 공물 생산지로 둔갑하고, 나아가 무엇보다 원에서 유배하는 사람들 유배지가 되면서, 탐라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반도의 직접 종속 사회로 빨려들고 만다.

이번에 확인했다는 절터는 그런 탐라가 한반도에 직접 종속하기 전, 그러니깐 탐라라는 왕국 체제를 유지한 그 시대에 그네들이 남긴 종교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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