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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1930년, 양의洋醫의 한의漢醫 인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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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는 일, 쓰라는 글은 안 쓰고 엉뚱한 데 관심을 뻗치는 것도 참 병은 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호기심이 없었던들 인류가 인류로 살아남았을까?

각설하고, 요즘도 무슨 열매나 풀뿌리 같은 걸 홍보할 때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이르기를 이거는...."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많이 본다.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한 기록을 세운 드라마 <허준>. 이걸 TV에서 틀어주던 10시~11시엔 정말로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허준과 <동의보감>, 한의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이 드라마를 기점으로 절정에 달하지 않았던가 싶다.



그렇게 뭐든지간에 <동의보감>을 끌어들여 근거를 삼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예컨대 어떤 신문기사에 인용되었다면, 기사 작성자가 <동의보감>을 인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세브란스병원 설립에 기부금을 냈던 미국의 부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 1838년 8월 1일  ~  1913년  6월 25일)



나아가 <동의보감>이란 이러이러한 책이라는 걸 (적어도 그 기사의 작성자와 예상 독자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의외로, 미장원 잡지만큼이나 엄청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던 일제강점기 잡지에서 <동의보감>을 언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우선 1927년 5월 우호익禹浩翊이라는 분이 <동광>이란 잡지 13호에 기고한 "無窮花考(上)"라는 기사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東醫寶鑑의 湯液篇 卷之三 木槿 條에 '木槿 무궁화'라 하였다. 東醫寶鑑은 許浚의 著인데 宣祖 29년으로 光海 3년까지의 作이다. (西紀 1597-1611년). 그러면 「무궁화」라고 文獻上에 뚜렷이 記載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筆者의 조사한 범위 내에서)"라고 하였다(여담인데, 이 우호익이라는 분은 일본 에도시대에 '懸吐翻刻한 訂正本' <동의보감>을 보고 논지를 전개했을 뿐 우리나라 목판본 <동의보감>을 보지 못하였다).

또 그로부터 6년 뒤, 1933년 2월 가람 이병기李秉岐가 "正初의 行事와 慣習"이란 제목으로 <별건곤> 제60호에 기고한 글에서 "도소주를 먹으면 그해ㅅ동안 온역을 알치 안는다고 동의보감(東醫寶鑑)가튼 책에도 적혀잇다." 라는 대목이 확인된다.

가람 선생 정도면 <동의보감>을 보셨을 법 한데, 과연 갖고 계셨을까? 가람문고에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이 두 기사 사이, 1930년 5월 <별건곤> 제28호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실려있다. '로아'라는 필명의 기자가 '청화의원'이란 병원을 경영하는 김은선金殷善이란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나눈 것을 토대로 한 인터뷰이다.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 1908



이 의사양반(편의상 닥터 킴이라 하자)은 '미용시술'을 하고 있는데, 그 시술이라는 게 무엇이냐 한즉 "이 藥은 내가 한 4년전에 연구해서 시험한 것인데 에페린, 해부쌀, 해부라씨 크림 세가지 올시다. 이 세가지 약으로 1기 2기 3기로 논아서 얼골에 잇는 죽은깨 짐 사마구갓흔 色素를 빼내는 것"이라 부인이나 여학생들이 많이 온다는 것이다.

이때는 아직 코 높이는 수술이나 쌍꺼풀 수술은 조선에선 안 했던 모양으로(일본에서는 했다고 하지만) 닥터 킴은 그 방법을 좀 배워오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하다가 여기서 기자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럼 漢藥에 대해서는 엇듯케 생각하심닛가. 朝鮮사람은 洋藥보다 漢藥에서 더 효과를 보는 모양이고 또 소중히 알고 잇는데요.

이에 대한 닥터 킴의 답은...

漢藥도 草根木皮의 藥材만은 좃슴니다. 그러나 첫제 漢醫들이란 병리학이나 약학상 素養이 업고 오즉 한 卷 醫學便覽이나 東醫寶鑑갓흔 책자에 憑據하야 형식적으로 집맥을 하고 극히 소홀하게 병증을 살펴서 論病을 하기 때문에 오진할 때가 十常八九요 또 劑藥하는 데 잇서서는 그들의 藥房文을 볼것 갓흐면 몃가지 그 病에 합당하다는 重材를 빼고는 아무 效能도 업는 藥材를 십여가지식 늘어 노앗슴니다. 그려! 그러고야 병이 나을 수가 잇나요.

'로아' 기자는 "그래도 東醫寶鑑 방식으로 증세에 잘 밧으면 백발백중이라는데요. 그러고 新醫로서 곳치지 못한 것을 漢醫가 어럽지 안케 造藥 비슷한 것으로 완치해내니 이상하지가 안슴닛가. 朝鮮 사람 체질에는 漢藥이 맛는 게 아닐가요. 洋藥은 서양사람들의 체질을 표준한게고. ... "라고 한의의 장점을 늘어놓는데,

닥터 킴은 조목조목 그에 반박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하신다.

그리고 病이란 藥도 藥이러니와 첫제 환자의 심리여하가 병세에 만흔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漢醫들은 道學者나 仙術客갓흔 風度를 가지고 환자의 마음을 威壓하게 되며 부질업시 信念을 가지게 하고 또 진찰하는게 철학적이여서 환자로 하야금 일종 미신적 신망을 가지게 하야 患者에게 저윽히 安慰를 주는 까닭으로 의외로 약효를 보게 되는게지요.

갓 쓰거나 도포, 개량한복 입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환자의 마음을 위압하게 되며 부질없이 신념을 가지게 하"는 일이라고 봐도 되는 것일까?

하기야, 백석의 "고향"이란 시를 보면 의원이란 여래의 얼굴을 하고 관우의 수염을 드리운 채 먼 옛적 어느나라 신선 같다고 하지 않던가?

글쎄, 아무리 그렇더라도 흰 가운 입고 기계로 맥을 짚기도 하는 요즘 한의사들이 보면 노발대발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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