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아이?]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서 찍는 목판인쇄는 활자와 달리 한 번 만들어두면 계속 그것만 찍어낼 수 있다.
하지만 재료가 나무인지라 마모되고 상하기 마련이다.
그런 경우 새로 판을 만들어 보충해야 하지만, 그때도 그게 쉽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귀찮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문드러진 목판을 그대로 찍으면 이렇게 나온다.
어떻게 읽으셨을는지.
*** Editor's Note ***
목판은 보통 판대기 하나에다 텍스트를 다 쑤셔박는다. 그것이 요새 개념으로는 1쪽 1페이지가 된다.
활자는 글자 하나씩 만들어 그 한 글자씩 텍스트 순서에 따라 틀에다 넣고 배열하고는 그걸로 찍어낸다.
글자의 가변성이라는 측면에서 금속활자가 훨씬 보폭이 크다.
목판은 문드러지면 판대기 하나를 새로 짜야 한다. 훼손된 부분만 땜질할 수도 있겠지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목판은 많은 글자를 통으로 새겨야 하기에 칼로 파기 쉬운 무른 나무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맹점이라 여러번 찍어내면 쉬 문드러지고 만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목판본을 보면 이미 여말선초에 찍어낸 것들이 문드러진 글자가 많다.
팔만대장경판은 800년이 지났는데 왜 그리 쌩쌩한가?
거질이라 역사를 통털어 몇번 찍어내 않아서지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물론 개중 가독성이 높은 문헌만 따로 떼어내서 찍을 순 있겠지만 그거 찍겠다고 저 먼 가야산 자락까지 갔겠는가?
완질 한 번 찍어내면 나라 살림이 거덜났다. 몇 부 찍지도 못해 기껏해야 50부 찍고 말았지만 그 50부만 해도 한 트럭이었으니 그 한 트럭이 국고를 텅 비게 했다.
식민지시대에 왜 문집 족보 발간이 성행하는가? 신식 잉크 발이 인쇄문화 도입 때문이지 뭐가 있겠는가?
구텐베르크는 혁명이었다.
고려의 금속활자로는 대량 인쇄는 불가능했다.
같은 금속활자라 해서 동급으로 놓지만 차원이 달랐다.
먹물은 잉크를 따를 수가 없었으며 닥종이는 너무나 고급이기에 열라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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