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을 불과 두달 남긴 1945년 6월, 태평양전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 미군은 오키나와까지 진출한 후 일본 본토 침공을 준비 중이었다. 이 작전으로 최소 미군 10만명이 전사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2. 독일이 5월 초에 항복하여 소련이 태평양전쟁 참전이 거의 확정적이었다.
3. 미국이 원자폭탄 투하 없이 전쟁을 마무리할 경우, 한반도는 소련이 전체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았다. 소련은 두만강을 경계로 일본 관동군과 접경하고 있었지만, 미군은 일본에 가장 가까운 곳이 오키나와였다. 일본군 주력도 만주 방면 관동군이 아니라 일본 본토를 지키는 남방 방면에 주로 배치되어 있었다.
4. 원폭 투하로 일본이 8월 중순 항복함으로써 38도선을 경계로 그 이남은 미군정이 수립될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종결 국면에서 원폭은 일본의 항복 자체를 결정지었다기 보다 (어차피 일본의 패전은 1945년에는 확정적이었다) 종전 이후 동아시아 정치 판도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원폭 투하로 미국은 일본에 소련의 진주를 용인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한반도의 경우도 38도선 이남을 확보하였다. 소련의 경우 태평양전쟁 참전 결과는 예상보다 소득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44년 7월-8월: 괌전투 (미군 사망자: 3000명), 사이판전투 (미군 사망자: 3500명)
1945년 2월-3월: 유황도전투 (미군사상자: 27,000명: 사망자: 6,800명))
1945년 2월 4일-11일: 얄타회담: 소련의 대일개전 합의. (이승만, 미국 정부가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했다고 비난)
1945년 4월 1일 ~ 1945년 6월 22일: 오키나와 전투. 미군 사망자 12,200 여명)
미국, 일본 본토 공격시 미군 사망자 10만 명 넘을 것으로 추정
1945년 5월 7일: 독일 항복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1945년 8월 9일: 소련 대일 전쟁 개시, 한반도 경흥 해방
1945년 8월 14일: 미국과 소련: 38도선 경계로 일본군 무장해제 합의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
1945년 8얼 15일: 여운형 "건준" 성립
1945년 8월 16일: 소련, 청진해방
1945년 8월 27일: 소련, 평양 진입
1945년 9월 6일: 여운형 "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1945년 9월 8일: 38도선 이남에서 미군정 개시.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분단의 이유 (0) | 2023.07.15 |
---|---|
판타지 물인 해방전후사 (0) | 2023.07.15 |
젤렌스키와 이승만 (0) | 2023.07.14 |
[唐詩] 이중경이 한양 별장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며[送李中丞歸漢陽別業]: 유장경劉長卿 (0) | 2023.07.13 |
한국작곡가 길옥윤이 쓴 마샬군도 국가 (0) | 2023.07.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