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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해방 이후 3년간의 미군정을 끝내고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고 동년 8월 15일 제 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 당시 미군정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성공적 선거의 적"은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북한의 방해?
그것이 아니고 미군정은 남한에서 선거가 제대로 치러질지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왜냐.
문맹률이 너무 높아서.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입법의원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문맹으로 4할이 기권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선거를 치른다고 해도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투표를 할 것 아니겠음?
이 때문에 1948년까지 미군정은 초보적인 한글 교육을 미치듯이 시행했다.
이 시기의 문맹률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48년까지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사실 뭐 대단한 수준의 교육이 아니었을 것이고 보면, 아마 후보자 이름 더듬 더듬 읽는 정도로라도 가르치면 문맹이 아니라고 분류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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