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5.11 14:36:58
<2000년전, White Tiger Hall에서 세미나가 열렸다>-1
신정근 교수, 반고 편집 백호통의(白虎通義) 완역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왕망(王莽)에게 탈취된 정권을 도로 빼앗은 유씨(劉氏) 왕조를 흔히 후한(後漢) 왕조라고 하고,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한 황실 복위를 이룩한 그 초대 황제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재위 서기 25-57년).
한 왕조 개창주인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라고 하지만, 한 왕실 적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방계 중의 방계였던 그는 용케도 시운(時運)에 편승해 권력을 쥐고 32년이나 그것을 농단해 신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하여 재위는 명제(明帝, 재위 58-75년)를 거쳐 3대 장제(章帝, 재위 76-88)에 이르렀다. 경학(經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장제의 시대는 전한말에 활약한 유향(劉向, BC 79-BC 8)과 후한말에 등장할 정현(鄭玄, 127-200)의 중간에 해당한다.
장제 재위 4년째인 건초(建初) 4년(79), 황제는 당시 내로라 하는 관료와 학자들을 소집한다. 이것이 그보다 128년 전인 전한 선제(宣帝, 재위 서기전 73-49) 감로(甘露) 3년(기원전 51)에 황제가 주도읍인 장안(長安)의 정궁(正宮) 미앙궁(未央宮) 부속건물인 석거각(石渠閣)에서 소집한 학술토론회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저명한 양대 학술세미나로 꼽히는 백호관(白虎觀) 회의였다.
백호관은 후한 당시 주도읍인 낙양성(洛陽城) 북궁(北宮)의 부속건물 이름이었다.(후한을 동한<東漢>이라고도 하는 까닭은 전한 주도읍 장안에 비해 그 도읍 낙양<洛陽>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 그래서 전한은 서한<西漢>이라고도 한다)
장제의 소집에 응한 사람들로는 가규(賈逵.30-101), 노공(魯恭), 정홍(丁鴻)이 포함돼 있었고, 태학의 박사들도 모두 참여했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얘기들이 오갔으며 그에 대한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작위는 왜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5등급으로 되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3등급인 까닭은 무엇인가" "오행(五行)이나 삼광(三光)을 본받기 위함이다."
"공(公) 경(卿) 대부(大夫) 중에 왜 유독 대부만이 두 글자인가?" "대부는 일을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10달만에 태어나는가?" "十은 완전수이기 때문이다."
"강신(降神)할 때 음악은 왜 대(臺)에서 연주하는가?" "귀신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동짓날은 왜 군사를 쉬게 하고 정사를 파하는가?" "이날은 양(陽)의 기운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말장난 같이 생각되는 대목들이 많다. 하지만 진짜 말 장난은 다음과 같은 사례가 해당된다.
(계속)
2005.05.11 14:37:00
<2000년전, White Tiger Hall에서 세미나가 열렸다>-2(끝)
신정근 교수, 반고 편집 백호통의(白虎通義) 완역
"달이 기우는 것을 왜 삭(朔)이라 하는가. 朔은 蘇(소생할 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朔과 蘇가 당시에는 같은 발음인 데서 연상된 억지다.
다음도 그렇다.
"嫁(장가갈 가)와 聚(모을 취)는 무슨 뜻인가? 嫁는 곧 家(집)이요. 聚는 取(골라잡다.고르다)이다." 장가 가서 가정을 이루는 행위를 발음이 같은 글자를 끌어다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帝(제), 즉, 제왕은 諦(살필 체)라는 설명도 같다.
하지만 말장난이 난무하는 이런 대토론회를 왜 개최해야 했으며, 그것이 미친 영향은 어떠한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천년 전, 그때의 동한(東漢)시대로 돌아가 그 시대를 이해하려 해야 한다.
漢長安城
당시는 소위 경학(經學)의 시대. 하지만 각 경전은 학파별로 텍스트도 달랐고,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제가백가가 쟁명한 시대였다. 텍스트라는 측면에서 특히 당시는 고문(古文)파와 금문(今文)파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서경(書經) 같은 경우는 옛날 글자로 된 고문파의 텍스트와 당시 통용되던 글자로 된 금문파의 그것이 엄청나게 달랐다. 이런 판국이니 그런 차이들을 감쇄할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장제가 the White Tiger Hall, 즉, 백호관 세미나를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것은 학문과 사상의 대일통(大一統)이었다. 물론 이런 욕망은 성공할 수도 없었고, 설혹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사람이, 학파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저런 말장난에는 그 시대의 의문과 고민과 그것의 해결을 위한 몸부림에 들어있다. 아무리 말장난이라고 해도 그런 말장난들은 이후의 중국, 나아가 한반도와 일본열도 문화까지도 구속하기에 이른다.
"帝는 諦이다"는 언설은 자고로 군주란 백성을 어루만지는 부모와 같아야 한다는 당위성의 철학을 더욱 강화하게 한다
백호통의(白虎通義). 이때 개최된 백호관 회의 성과물을 반고(班固, 32-92)라는 이가 정리해 놓은 것이다. 전한시대 그의 선배인 사마천과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역사가라는 반고는 한서(漢書) 외에 이런 책도 정리했으며, 그 자신 당대의 걸출한 시인이기도 했다.
이 백호통의가 한국학술재단이 지원하는 '학술명저번역총서'에 포함돼 성균관대 신정근(辛正根) 교수에 의해 최근 완역됐다. 이 백호통의 완역은 본토격인 중국이나 대만, 일본에서도 아직 없고, 다만, 1949년 중국계 증주삼(曾珠森)이라는 학자가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Po Hu T'ung : The Comprehensive Discurssions in the White Tiger Hall'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한 것이 이전까지 유일했다.
국내, 나아가 동아시아권 처음으로 선보인 완역본이라는 점에서 이번 성과가 갖는 의미는 자못 크다.
하지만 여러 아쉬움을 남긴다. 우선 증주삼의 영역본에도 있는 원문이 모조리 누락됐으며, 나아가 주석(注釋)이나 문헌 해제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백호통의와 같은 문헌은 다른 동양고전에 비해 일반은 물론이요, 학계에서도 매우 낯선 부류에 속하므로 본분의 분량을 뛰어넘는 상세한 주석과 고증, 나아가 해제가 요구된다. 소명출판. 455쪽. 2만8천원.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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